말이 울부짖는다. 사람들이 통곡한다. 순하디 순한 소마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죽음의 공포와 폭력의 잔인함에 모두가 경악한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피레네 산맥 작은 도시의 비극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러나 ‘게르니카’는 스페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항우는 계곡에 수천명을 파묻어 버리며 황제가 되려 했고 백인들은 지구상 곳곳에서 원주민들을 멸종시켜 가며 제국을 건설했다. 게르니카를 폭격했던 나치는 다시 유대인 대학살을 저질렀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인도네시아의 발리, 48년의 제주도와 79년의 부산 마산과 80년의 광주, 그리고 보스니아 르완다 수단 동티모르 체첸 시에라리온….
게르니카는 지금도 계속된다.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백만명에 이르도록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종교, 인종, 민족, 권력, 이념…. 심지어는 시에라리온에서처럼 다이아몬드라는 돌맹이를 위해 인간의 팔다리를 절단내는 경우도 있다.
▼이순간에도 통곡은 계속되고…▼
힘을 갖자마자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해 버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베트남전에서의 한국인을 보면 인간이 진정 전지전능한 신의 피조물인지 의심했던 실존주의자들의 고민을 이해할 만하다. 순자나 토머스 홉스는 인간의 본성 자체에 악(惡)의 소굴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 UC산타바바라의 석좌교수 제프리 버튼 러셀은 인간의 역사와 언제나 함께 해 온 악마의 문화사를 읽어내며 선과 악, 신과 악마는 인간의 양면성이 투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 인간 역사의 어디에서나 악의 승전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가 악마의 찬가로 가득차지 않은 것은 인간들이 ‘반성적 사유를 통한 선(善)에의 의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유대인 여성으로 태어나 나치에 쫓겨다녀야 했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반성적 사유가 없을 때 사회의 구조적인 악 속에서 악의 시녀가 돼 버리고 마는 인간의 현실을 지적했었다. 이미 악의 승리가 낯설지 않은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악의 현실 자체가 아니라 악의 극복을 위해 싸웠던 역사를 망각한 채 반성적 사고를 잃고 악의 부활에 관대해진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우리에게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얼굴 붉히며 악의 승리 앞에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일제침탈기를 거쳐 분단과 남북전쟁, 그리고 민주화과정을 거치며 먼저 떠난 이들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다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반세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얻게 된 조그만 ‘소극적 주권’을 향유하느라 그 시절을 생각할 틈이 없다. 그들을 기념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두려운 것은 경계를 늦출 때 악마가 나를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내가 악마로 돌변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르니카의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에는 감지 못하는 눈들이 있다. 게르니카의 사람들은 눈을 뜨고 죽는다. 원통해서가 아니다. 악이 승리하는 역사를 똑바로 보고 후세에 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악은 게르니카의 눈들이 추악한 학살과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할 날을 기다리며 역사의 무대에 다시 주인공으로 오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에게 2000년은 단지 예수탄생 2000년이 아니라, 분단 55년, 4·3사태 52년, 한국전쟁 50년, 4·19의거 40년, 부마항쟁 21년, 광주항쟁 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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