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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경택칼럼]DJ의 과신(過信)

입력 | 2000-05-26 19:33:00


이한동 국무총리서리 지명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자민련과 청와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우선 자민련측은 식언(食言)에 대해 어느 정도 욕먹을 각오는 하면서도 ‘시간이 약’이란 표정이었다. 언론에서 좀 떠들다 말 것이고 국민도 곧 잊어버릴 테니 크게 신경쓸 것 없다는 식이다.

자민련의 기대대로 총리지명 일주일도 안돼 비난의 소리가 겉으로는 상당히 잦아들었다. 이렇게 되니까 자민련의 오너인 김종필 명예총재의 말도 달라졌다. 이총리서리가 지명된 직후인 닷새 전까지만 해도 “누가 공조한대?”라며 역정을 내던 그가 엊그제는 “우리가 갈 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며 사실상 공조복원을 선언해버렸다. 40년 정치판에서 닳고닳은 노정치인의 변신술이 놀랍다.

반면 청와대측의 반응은 “말을 바꾼 것은 자민련 사람들이지, 우리는 상관없다”는 투다. “우리는 공조를 계속 유지해왔고 공조파기 선언은 자민련이 일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의 화살은 자민련 쪽으로 가야한다는 뜻이다.

연출자는 김대통령

과연 그런가. 물론 국민을, 유권자를 우습게 보고 말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듯 한 김종필 이한동씨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총리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이번 소극(笑劇)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번 연극의 주연 배우는 자민련 수뇌부 2인이지만 이 배우를 움직인 연출자는 김대중 대통령이다. ‘공조 절대불가’를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자민련총재를 총리로 끌어들이면 여론은 어떨 것이며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가 어떻게 번져나갈 것인지를 김대통령은 잘 알았을 것이다.

더구나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국가대사를 눈앞에 두고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뤄나가야 할 판에 정치권, 특히 여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야당을 자극하면 좋을 게 없다는 것도 모를리 없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불리한 요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이 자민련총재를 총리로 모셔간 속뜻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김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토대로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첫째, 김대통령은 지금까지의 정치경험으로 소수정권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여당이 제1당이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생각, 즉 수(數)에 대한 집념이다. 총선 민의(民意)가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하라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수의 힘’이 더 유용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야당에 대한 불신, 특히 한나라당이 이 정권 초기 발목을 잡았다는 생각 때문에 수에 더욱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자신의 능력과 역할에 대한 과신이다. 대통령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챙길 수 있으니까 총리야 누구를 시킨들 아무 일 없다는 생각인 듯하다. 셋째,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다수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야당의 반발이나 언론의 비판 같은 것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국민 허탈감 깊어져

근본적인 문제는 자민련과 공조를 복원하고 무소속을 끌어들임으로써 다수가 되는 것도 좋지만 대신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면 그 다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비록 여당이 소수지만 국민의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지지를 받는다면, 야당과 건설적인 대화를 해나가는 분위기를 유지해 나간다면, 소수인들 무슨 문제이겠는가.

총선에서의 참패로 숨을 죽이고 있던 JP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옴으로써 3김식 정치는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거짓말’ ‘말뒤집기’ ‘국민 우습게 보기’ 등 3김식 정치의 전형(典型)을 다시 보게 된 국민의 허탈감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국민은 3김씨의 도덕적 기반, 경제쪽에서 유행하던 말을 빌리자면 펀더멘털에 대한 회의를 더욱 진하게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어경택euh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