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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신간]유혁인 유고집 '만월홍안'

입력 | 2000-05-26 20:08:00


‘다 저문 선비촌에 태어나서/ 선비없는 시대를 아닌 선비로 살았어도/ 선비보다 선비였고 문학을 사랑하되 문인보다 더하여/ 문학에 때 아니 묻힌 이’

73년부터 유신말까지 6년간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한 경주 유혁인(經洲 柳赫仁·1934∼1999)의 인품을 그의 집안 여동생인 시인 유안진(柳岸津)이 추모해 비문 뒤에 남긴 글 중 일부다.

지난해 1월29일 영면한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두 아들 석춘(錫春·연세대 사회학과교수)석진(錫津·서강대정외과교수)이 정성껏 찾아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책 제목 ‘만월홍안(滿月紅顔)’은 고인의 외모를 벗들이 묘사해 추모비에 새긴 글에서 따왔다.

경북 안동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언론인,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 대사, 장관 등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삶을 관통한 것은 늘상 ‘선비정신’이었다. 그가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도 결코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았고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10·26후 1년여를 빼고 역대 정권에서 다양한 공직을 거친 것도 남다른 ‘덕’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책에 담긴 글은 수필 칼럼 일기문 쪽지글 논문 연설문 한시 등 다양하다. 동아일보 재직시절 ‘문사(文士)’로 필명을 떨쳤던 것. 그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명문들이다.

특히 82년 3월31일과 6월15일 두차례에 걸쳐 세 자녀 석춘 석진 석란(錫蘭)에게 남긴 글 ‘회상의 일기’는 10·26 이후 격동의 70년대를 권력의 정점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진솔하게 옮겨 놓은 ‘현대사 실록’이다. 유신체제 내부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나름의 계획과 구상이 있었으며 대통령과의 교감 아래 대통령이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극비 개헌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비사(秘史)도 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회고의 글을 남긴 이유는 자신이 참여했던 정치현실을 정당화하거나 신념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너희 3남매가 나중에라도 이것을 읽고 역사의 포폄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자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일념에서이다. 그것이 나의 소망의 전부이고 이 기록을 쓰는 목적의 전부이기도 하다.”

맏아들 석춘은 “아버지가 남긴 글을 발견할 때마다 생시에 우리가 너무 아버지의 생각과 진면목을 몰랐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고 말했다.

차남 석진은 “정치학을 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님으로부터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현대사의 진실’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회한을 적었다. 462쪽 2만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