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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윤흥길/자운영보고 '자우림'하더니…

입력 | 2000-05-28 19:50:00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선유도를 다녀왔다. 명색이 졸업여행인데 하필이면 왜 외딴섬이냐는 투로 당초부터 불만의 기색을 내비치던 학생들은 가뜩이나 짧은 일정의 강행군에 지친 탓인지 선유팔경을 둘러보면서도 서해의 비경 또는 절경이라 일컫는 세상의 평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 혼자 공연히 기분이 들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꼴이었다. 비가 내리고 먼바다에 높은 파도가 일겠다던 일기예보와는 딴판으로 오월의 하늘은 맑고 봄바다는 잔잔했다. 군산항을 떠난 여객선이 두시간 가까이 바닷길을 헤친 끝에 우리 일행을 목적지에 내려놓았을 때 남성미와 여성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고군산군도의 그 거친 듯하면서도 아기자기한 풍광을 접하며 나는 거지반 우격다짐하다시피 학생들을 그곳까지 끌고 온 내 판단이 가히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연전에 작고하신 소설가 김정한선생은 생전에 기회 있을 적마다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의 이름이 지닌 중요성을 후학들에게 유난히 강조하신 일화로 유명하다. 이름없는 잡초가 어쩌고, 이름 모를 새가 저쩌고 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소설 문장은 무책임의 극치라는 질책이었다. 무릇 생명 있는 것들 치고 이름 없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몰랐다면 알려고 노력해서 꼬박꼬박 제 이름을 챙겨주는 것이 작가의 올바른 자세라는 이야기였다.

도시 환경에서 나고 자란 거개의 문학도들은 요즘 자신의 소설 습작 속에 그 무책임한 표현마저도 거의 등장시키지 않는다. 어쩌다 ‘이름 없는 잡초’ 와 ‘이름 모를 새’가 작품 속에서 눈에 띌 경우 반가운 느낌이 들 지경으로 오늘날 자연의 생태계는 젊은 세대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실정이다.

작중인물들을 인공의 구조물 안에 철저히 가둔 채 그 안에서만 숨쉬고 잠자고 사랑하고 방황하기를 요구한다. 새소리가 들리고 꽃향기가 날리고 흙냄새와 갯냄새가 풍기는 자연환경과는 담을 쌓은 채 번잡한 길거리, 아스팔트와 가로등, 카페와 노래방과 네온사인, 컴퓨터 책상 등 인위적 환경 속에다만 주인공을 배치한다면 그 건조한 인물에게서 더운 가슴을 지닌 인간의 생생한 면모를 기대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게 어디 젊은 세대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들이 자연에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은 자연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고, 그들이 자연을 모르는 것은 부모세대가 자기 자식들을 입신양명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난 존재쯤으로 착각하여 자연과 친숙해질 기회를 압수 당한 채 오로지 입시공부에만 매달리게끔 유도한 결과일 것이다.

여행지를 결정하면서 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했다. 생명의 고향인 그 자연을 모르고서는 인간학이자 인생학인 문학도 본때 있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제주도나 설악산은 신혼여행이나 여름휴가 등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갈 기회가 많다, 선유도는 이런 특별한 기회 아니면 아마 평생 못 가볼 곳이다, 더구나 새만금 간척사업 때문에 지금의 고군산군도 풍경은 얼마 후면 지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등등의 말로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다와 산과 갯벌과 모래사장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자연을 몸소 체험해 보는 기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요게 바로 자운영이란 풀이다.”

선유도와 연도교로 이어진 장자도의 해안절벽을 트레킹하면서 나는 길섶에 앙증맞게 핀 보라색꽃을 가리켰다. 그 말을 뒤따르던 학생이 받아 동료에게 고대로 전달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뭐? 자우림이라고?”

비록 풀이름과 인기 보컬그룹의 이름을 혼동하는 실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 둘 자연의 생태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혼자서 대견스러워 했다. 자연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애정은 이제 곧 환경보호에 대한 관심으로, 인간과 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겠지.

선유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바다를 가로지르며 여객선과 함께 끝없이 달리는, 참으로 길고도 긴 방조제를 보았다. 환경파괴의 표본으로 지적되면서 요즘 반대운동이 한창인,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의 성과물이었다. 그 방조제를 보면서 나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환경오염이 가장 심한 나라로 뽑혔다는 최근의 뉴스를 떠올렸다.

윤흥길(소설가·한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