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들기는 종종 개인적 경험이나 욕구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내용이 추악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아낼 때는 더욱 그렇다.
데뷔 4년만에 4편의 작품을, 자신의 데뷔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악어'처럼 먹어치운 김기덕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 영화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섬'과 같은 곳에서 고립된 작업을 계속 해왔다.
그의 다섯번째 작품 은 비주류로서의 고독함과 또 자신을 별종시 하고 있는, 주류 영화계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 김감독의 외로움과 적개심은 다소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영화 제목 그대로 '실제상황'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 가는 한 젊은이(주진모)가 있다. 늘 공원 한 구석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살아가는 이 주인공은 그러나, 마음속 분노만큼은 한마리 배고픈 늑대와 같다.
그의 주변엔 자릿세를 뜯으러 다니는 공원의 3인조 깡패를 비롯해 그의 그림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진사, 벌건 대낮에 다른 남자와 버젓이 바람을 피워대는 애인이 있다. 또 자신의 옛날 여자를 가로 챈 뻔뻔스런 뱀장사 친구가 있고 해병대에서 말년까지 그를 못살게 굴었던 군대 상사, 그리고 언젠가 자신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이 있다. 그는 늘 이들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느날 6mm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주인공의 주변을 맴돌던 한 소녀가 그를 낯선 연극 무대로 이끈다. 그리고 그는 처음 본 남자에게 영문도 모른 채 죽도록 얻어 맞는다. 그 남자는 폭력을 휘두르면서 계속 소리를 지른다. "왜 참는 거야, 화를 내란 말야"라고. 남자로부터 치도곤 얻어맞은 후 거리로 쫓겨 나온 그는 마침내 저승사자로 돌변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매스컴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데는 단 3시간만에 촬영을 완성한, 기네스 북 감의 제작 방식때문이다. 러닝 타임은 총 1백분. 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 쏠린 여러 의혹의 눈길은 영화 한편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성될 수 있는가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가'라는 정서에 더 가까웠다. 그런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기덕감독은 촬영현장에 수십명의 취재진을 달고 다니며 영화를 완성했다.
최단 시간 촬영을 위해 김기덕감독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다. 35mm 카메라 8대와 소형 디지털카메라 10대. 시퀀스가 이어지는 동선마다 독립적인 제작팀을 두고 치밀한 사전 연습을 거쳐 단시간내 촬영을 완성했다.
장비와 인원이 평소의 몇배가 들어간 만큼 단 3시간 촬영이긴 했지만 제작비는 그가 평소 써왔던 대로, 다른 영화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이긴 하지만 들만큼 들었다. 따라서 이번 노력이 부질없는 짓인가, 아니면 의미있는 것인가는 작품 질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느냐에 달려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김기덕의 이번 작품은 '김기덕 특유의 개성은 죽었지만 놀랍게도 이전 작품에 비해 웰 메이드의 성향을 보이는' 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는 분명, 3시간 촬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시간안에 모든 것을, 그것도 제대로 끝내야 한다는 강박증은 김기덕의 평소 습관과는 달리 '잘 짜여진' 프리 프로덕션 체제를 도입케 했다.
사전 각본과 연습량이 충분했던 만큼 '웰 메이드'의 결과는 당연했다. 적어도 이 영화 직전 작품이었던 과 비교할 때, 내러티브 구조가 오히려 탄탄해 보일 정도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색깔을 희생해야 했다. 종종 그의 이 유별난 색깔은 내러티브상의 자연스런 흐름을 깨는 것으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자신만의 특성을 집어 넣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이다. 잘 만들었지만 김기덕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주인공역의 주진모를 제외하고 연극무대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익힌 조연들을 대거 기용한 것도 아마 아마츄어들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판단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같은 상황 판단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음이 증명됐다.
6mm 카메라를 들고 그를 쫓는 소녀의 이미지는 바로 주인공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다. 충동의 외연화를 표현하기 위해 활용한 이 캐릭터는 다소 연극적이긴 했지만 극의 흐름을 원활하게 이어주는 적절한 장치였다고 평가된다. 어차피 김기덕감독의 이번 영화는 잘 만들어진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 모두를 대학로 일대로 설정한 것도 그래서 의미있게 보인다.
김기덕의 유별난 실험은 일단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그가 예전처럼 다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 때도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번처럼 '잘 짜여진'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오동진(ohdjin@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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