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외곽 숲속에 있는 영빈관(빌라 마다마) 진입로 입구. 29일 오전에도 어김없이 휴대전화와 수첩을 든 동양인들이 나타나 진을 치고 있다.
이들은 오전 9시반쯤이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둘 모여들었다가 오후 5, 6시쯤이면 흩어진다.
서울의 여름을 방불케 하는 뙤약볕 아래서 양복을 입은 채 하루종일 외교관 번호판을 단 승용차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는 이들은 24일부터 로마에서 시작된 북-미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온 한국과 일본 기자들이다.
북-미회담은 회담이 시작하는 날짜와 도시만 확정됐을 뿐 언제 끝날지,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회담’이다. 이번에도 회담 전날에야 회담장과 회담시작 시간이 공개됐다. 의제가 무엇인지 공개되지 않는 것은 물론 회담이 끝난 뒤 결과를 설명하는 브리핑도 없다. 심지어 다음날 회의가 계속될 것인지 여부도 현장을 지키고 있어야 겨우 알 수 있다.
그날 그날 회담 분위기와 전망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는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金桂寬)외무성 부상이 영빈관이나 숙소인 그랜드리츠 호텔을 드나들며 어쩌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몇 마디가 전부다. 취재진들이 햇볕 가릴 지붕도 없는 영빈관 입구 길가나 리츠 호텔 로비에서 온종일 대기하는 이유가 바로 김대표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김대표의 얼굴표정도 회담 분위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지표. 때문에 기자들은 회담이 끝난 뒤 회의장을 떠나는 김대표의 얼굴을 살피기에 바쁘다.
이에 비해 미국측 수석대표인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는 북-미회담 수석대표가 된 이래 어떤 질문에도 입을 여는 법이 없다. 그래서 “기자 여러분들, 더위에 고생 많으시지요”라는 김대표의 말 한마디가 힘이 되기도 한다. 가물에 콩 나듯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 미 국무부의 회담 관련 브리핑도 기사 방향설정에 도움이 된다.
취재진들이 단편적인 조각그림에 자신의 추론과 전망을 보태 그려낸 북-미 회담의 밑그림은 회담이 끝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회담이 끝난 뒤 양측 대변인 발표가 있을 경우 ‘작문’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서방선진 7개국(G7) 중 하나인 이탈리아와의 수교 사실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로마를 회담장소로 결정했다. 또 호주와 수교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시점이어서 이번에는 북한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런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현재 로마와 바티칸은 대희년을 맞아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 및 순례자들로 만원이다. 2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비롯해 로마 시내 4개 대성당의 청동문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전세계에서 몰려온 신자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시내 곳곳의 주요 성당과 종교 관련 유적지에는 푸른 앞치마를 두른 자원봉사자들이 화해와 관용의 대희년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철저한 냉전논리와 비밀주의 속에 북-미회담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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