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으로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분야는 미디어와 표현의 영역일 것이다. PC통신이나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매체들은 대중들에게 정보의 생산, 변형, 교환이 손쉬운 표현 매체를 제공하였고 그만큼 표현물도 증가하였다. 무엇보다 정보통신매체에는 '편집권'이나 '편성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권력이 대중 매체에 발휘해 왔던 통제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대중은 구텐베르크 이후 최고의 표현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인터넷의 파급력에 당황한 각국의 정부는 뒤늦게 사이버 국경이나 인터넷 등급제와 같은 통제 장치들을 만들어 내느라 부산하다. 하지만 이미 권력의 입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하는 자유의 맛본 대중들은 쉽게 굴복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은 때로 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집단적으로, 그리고 지구적으로 행동한다.
이로 인하여 표현과 통제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시민권의 하나로서 널리 인식되어 온 '표현의 자유'가 논쟁적인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변화와 표현의 자유▼
미국에서 지난 몇 년 간 시민사회 대 국가 간의 충돌을 계속 빚고 있는 통신품위법(CDA: Communications Decency Act)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997년 연방대법원이 통신품위법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논쟁은 일단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어린이 인터넷 보호법이나 인터넷 등급제 등 '인터넷의 보다 세련된 통제'를 골자로 하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면서 논쟁은 2라운드에 들어서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가가 매체에 강력한 통제 권한을 발휘해 온 한국에서는 논쟁 이전에 통신상의 표현에 대한 실정법의 과도한 적용과 인신상의 구속이 먼저 이루어졌다. 주로 문제가 되는 법률은 전기통신사업법(제53조와 제54조), 선거법(제93조, 제251조), 형법(제244조), 국가보안법 그리고 청소년보호법 등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포괄적이고 모호한 규정으로 지적받고 있다. 즉 발휘할 수 있는 권한에 비해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내용' 혹은 '후보자 비방' 등의 추상적인 기준만을 가지고 있어서 행정부의 자의적인 개입과 위헌 시비를 낳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94년 3월 서점에도 유통되고 있는 도서 및 공산당 선언을 통신에 올렸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던 '현철동 진상호' 사례의 경우 과도한 법집행 시비를 낳으며 결국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내외신문에 올라온 김일성 신년사를 통신에 쳐서 올렸다는 이유로 구속된 '희망터 이창렬' 사례의 경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던 지난 413 총선 시기에도 선거에 대한 통신상의 표현이 일체 선거운동 상의 사전선거운동과 후보비방으로 해석되고 입건되는 사례들이 생겨나면서 시민단체들의 활발한 낙선·낙천 운동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음란물' 규제 또한 표현물과 현실 사이의 이중적 잣대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 1998년 5월 재미 누드모델 이승희씨가 방문할 당시 국내 언론과 여론은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지만 홈페이지에 그의 사진을 게재한 한 통신인은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례가 있다.(http://user.chollian.net/~irocz28/)
다른 매체에 대한 국가의 심의 기능이 약화되는 추세와는 반대로 이런 불균형한 사례들을 양산하면서 인터넷에 대한 규제 권한은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는 사실상 인터넷이나 통신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대중들의 공포를 자극함으로써 규제 권한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 보호'는 "당신의 자녀를 안전하게"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국가 권력의 통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청소년 보호와 표현의 자유▼
최근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논란은 1997년 청소년보호법(청소년보호법) 발효 이후 부쩍 증가하였는데 주로 '음란물 사태'의 양상을 띄고 진행되는 것이 큰 특색이다. 흔히 표현의 자유는 국가안보와 미풍양속이라는 근거로 제약되는데 국가안보 논리에 대해서는 사회운동 진영의 대응이 활발한 데 반하여, 음란성 시비에 대해서는 문화예술계를 제외한 사회운동 진영에서 회피해온 주제이다. 그러나 으로부터 표현의 자유 논쟁이 음란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면서 표현의 자유의 '진전' 역시 이에 대한 논쟁을 둘러싸고 발전해 왔음을 상기할 때 이는 결코 간과할 주제가 아니다. 국가기관이 앞서서 검열하겠다는 주장 이외에는 다름이 아닌 '사이버 국경' 계획에 대하여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발표를 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 영화 에서 (원래 미성년인) 춘향이의 나이가 문제라며 형사고발 운운이 오고가는 최근 한국 사회의 현실은 '청소년 보호'라는 잣대가 무소불위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케 한다.
김기중(2000)은 다른 표현행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성표현 영역에 대해서는 금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향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표현의 자유란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용'이므로 성표현의 확장 없이 표현의 자유가 확장되기를 바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가장 견해차이가 크고 참기 어려운 부분이 성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설'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단지 '사실주의'일 뿐이며 한 독자의 눈에는 음란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단지 '현란한' 것일 뿐이고, 한 부모에게는 '쌍스러운' 것이 다른 부모에게는 '교훈적'인 것이라는 점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영역의 표현을 받아들이기는 더욱 쉬울 것"이다.
고길섶(1999)은 각종 사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청소년보호법이 국가보안법과 같은 노골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국가권력 행사의 새로운 장소가 되고 있으며, '미성년자보호법',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 '공연법',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등이나 그에 근거한 각종 심의기구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청소년보호법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법령을 굳이 제정해야했던 필요의 본질은 '매체 탄압'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글에서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법이자 성인법이다! 그 법령의 효력은 … 성인들과 청소년들을 망라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보다 더 절대적이다. 청소년보호법은 사실상 모든 인구를 대상으로 벌이는 새로운 전쟁기계이다.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이 정치윤리적으로 호출했던 국민/국민적 개인의 이미지를 이제 사회윤리적으로 시민/시민적 개인으로 호출하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논쟁 지점은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까? 일상적인 표현들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공간에서는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논쟁 구도가 적용될 수 없다. 한편 정보통신공간을 서적이나 서점과 같은 공간 - 개인의 선택권이 존재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문과 같은 편집권이 발휘되는 공적인 공간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쟁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청소년과 온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청소년을 정보로부터의 보호 대상으로만 상정할 것이 아니라 정보에 자유로이 접근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고 표현의 자유도 가지고 있는 정보 주체로 상정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볼만 하다. 또 각종 자료와 정보가 급증하는 매체 환경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자신의 표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른 이의 표현에 대한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라는 장기적인 관점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터넷에 대한 통제와 그 기준이 국가에게 획일적으로 위임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핵티비즘과 표현의 자유▼
한편 해커에 대한 두려움도 음란물에 대한 두려움만큼 조장되고 있다. 모든 해킹 행위를 '사이버 테러'로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그렇다.
그러나 해킹은 원래 정치적이면서 집단적인 행위이다. 정보의 개방과 공유에 대한 윤리를 주장했던 1세대 해커로부터 베트남 참전 반대 행동의 하나로 전화사용료 거부 운동을 벌였던 폰프리커(phone phreaker), 그리고 최근의 핵티비즘을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선 cDc나 일렉트로히피스, 혹은 핵티비즘 토론방(http://hacktivism.tao.ca)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커들이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다.
98년 9월 동티모르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는 포르투갈 해커들의 인도네시아 정부웹사이트 해킹, 98년 10월 카슈미르 해방을 지지하는 해커들에 의한 인도 정부 웹사이트 해킹, 멕시코 해커들의 미국기업에 대한 인터넷 비즈니스 방해 선언, 99년 6월 신자유주의 반대 618 행동을 지지하는 좌파 해커들의 공격설, 그리고 11월로 이어진 WTO회의 주최위원회 웹사이트 공격, 2000년 4월 유전자조작 농산물(GMO)을 사용하는 기업에 대한 공격 선언 등 핵티비즘의 사례들은 계속 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해킹이 온라인 행동 방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접근할 때 분명히 취해야 할 관점은 소박하다. 온라인 상에서도 집회·결사·언론의 자유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온라인 공동체는 현실 공간의 공동체와 마찬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치적인 집단으로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온라인상에서 관심, 취향, 직업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구성된 어떠한 공동체도 그들의 의견을 집단적으로 게재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핵티비즘은 시위 방법의 일종이다. 일례로 야후와 이베이 등 미국 인터넷 사이트를 대상으로 잇따라 발생한 해킹에 대해서는 '사이버 시위'로 보는 견해가 많다. 언론의 관심을 끌기 좋은 사이트를 골라 연쇄적으로 건드리면서 파급 효과를 노리는 방법은 마치 2~3시간 가량 길을 막고 시위를 벌이다 자진해산한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의 경향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집단행동의 일체를 범죄시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표현/통제 사이의 갈등 국면에서 해킹에 대하여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통제를 정당화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누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장여경/진보네트워크 정책실장 della@www.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