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젊은 정치인들과 한 시민운동가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인간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글이 나가면 그들의 잘못을 옹호하려 한다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나 스스로 침착하고 어른스럽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일에 따라서는 노도처럼 분노해야 할 때가 있고 가을날 호수처럼 냉철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번 일은 후자의 경우인데도 불구하고 부글거리는 나 자신의 속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와 함께 원색적인 비난과 원망으로 가득 찬 기사들을 읽는 심정은 실로 착잡하기만 했다. 젊은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에 대한 실망보다도 경우에 적절치 않게 반응하는 경박한 나 자신과 사회의 경향이 더욱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비난-원망보다 성숙한 대응을▼
참된 의미의 시민정신은 어떤 것일까? 5·18 영령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비난과 원망만으로는 시민정신을 꽃피울 수 없다. 증오와 분노로는 5·18 정신이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심성과 삶의 터전인 이 사회를 지속적으로 잘 다듬어 나가는 일이다. 또 5·18 정신을 일상의 생활문화로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터이다.
지금 나는 젊은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를 위해 변명하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본능에 나약한 인간 존재의 슬픔을 변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열린 자세로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고자 하는 몸짓이다.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본능을 지니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름답고자 하는 것은 여성의 원초적 본능이다. 본능은 왜곡된 성문화 이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는 여성을 향한 맹목적인 본능이 있다. 남성의 본능도 남성우월주의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인 이 본능은 시도 때도 없이 작용한다. 이 본능은 순간 순간 조화롭게 관리 조절하지 않는 한 언제나 말썽을 부릴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본능 앞에서 무력하다. 인간이란 무지와 본능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는 허점투성이의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이 점을 정확하게 통찰할 때 인간적이고 바람직한 해답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남녀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존재임을 깊이 이해하는 안목이다. 소유와 지배를 위한 싸움의 논리가 아니고 서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깊은 애정의 배려가 필요하다.
서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무지한 채 주위의 시선 때문에 지켜지는 타율적인 도덕성은 위선의 병만 깊게 할 뿐이다. 삶의 질적인 향상을 위한 자율적 도덕성을 확립해야만 희망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일이다.
삶은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삶 속에 담을 것인가는 언제나 당사자의 몫이다. 젊은 활동가들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도 성숙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마땅하다.
잘 알다시피 막돼먹은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 실망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도록 뼈를 깎게 하는 질책과 함께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끼는 마음으로 기회를 주자▼
당사자들도 솔직 겸허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대범함을 보여야 한다. 자기정화와 새로운 태어남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근신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위축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야 한다.
시민정신과 5·18 정신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모든 열정을 바쳐야 한다.
우리 모두 사람을 아끼는 마음으로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넉넉함을 가졌으면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386출신 정치인 술판문제에 관련되지 않은 다른 386출신 야당 국회의원이 여론의 지탄을 받은 정치인들에 대해 “과거를 팔아 출세를 도모하는 천박한 인격들이 아니다. 짓밟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새싹들이다”라고 한 말을 모두 함께 음미했으면 한다.
도법(실상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