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씨네존/리뷰]분위기는 있지만 긴장이 없는 판타지 '비밀'

입력 | 2000-06-05 10:35:00


"없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거고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모르면 그건 없는 거란다."

박기형의 두 번째 영화 의 한 장면에 나오는 알 듯 모를 듯한 대사는 이 해낸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일러준다.

해낸 것은 "우리가 모르지만 있는 것, 모르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초능력을 다룬 것이고 이루지 못한 것은 더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화면에 풀어내지 않고 제목처럼 비밀스럽게 놔뒀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베일을 벗기는 장치가 지나치게 신중해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어리둥절한 채 관망하고 있어야 한다. 박기형은 얼마간 관습적이면서 그만큼 학교현실의 억압을 공포 충격 장치로 도발한 의 익숙한 공포로부터 내밀하고 개인적인 표현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구호(김승우)가 초능력을 지니게 된 신비한 소녀 미조(윤미조)에게 반한 감정의 정체는 사랑인지, 매혹인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끌리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카메라는 영화의 많은 부분을 구호와 미조의 시선 교환으로 끌고 가고 텔레파시로 말해지는 대화, 서로의 눈으로 들어가 보는 투시, 물방울을 움직이는 염력을 지니게 된 미조의 초능력 때문에 빚어지는 사건들을 서서히 풀어간다.

미지의 세계로 밀봉된 이 초능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감독 박기형은 관객을 포섭하는 충격과 자극의 장치보다는 초능력의 알 수 없는 세계의 매혹에 관객을 전염시키려 애쓴다. 구호의 감정은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여러 겹의 무늬로 짜여 있다. 그것은 미조의 신비한 외모가 감춘 알 수 없는 영혼의 그늘을 보는 두려움, 미지의 초능력 세계를 체험하는 경이, 십대의 순수한 미에 반하는 매혹이다.

은 분위기는 있지만 긴장이 약하다. 소녀 미조의 밀봉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구호의 심리 묘사는 지나치게 정적이다. 관객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져야 할 마땅한 지점에 서스펜스가 없는 것이다.

은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안달하는 관객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공포 심리 스릴러 쯤으로 영화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를 차분하게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미조의 초능력을 빚어내게 한 비밀에는 존속살해라는 엄청난 과거사가 숨겨져 있다.

그런 미조를 보살피는 구호는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아내에게 버림받은 남자다. 가정이 망가진 두 사람, 삼십대와 10대가 초능력을 매개로 마음을 합친다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데도 상식적인 사회적 윤리로 접수되지 않는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 나누기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긴장이 없다.

순수와 타락이라는 상식적인 이중경계를 세워놓고 영화는 구호와 미조 사이에 흐르는 새로운 에너지와 감정의 흐름을 도취하듯이 바라본다.

초능력이 파괴적인 힘으로 변하는 순간, 곧 미조의 어두운 과거를 주위 사람이 알게 되면서 미조의 염력이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는 순간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그때까지 구호와 미조의 순수한 감정 교환을 만끽하기에는 너무 단조롭다.

초능력을 매개로 일상적인 풍경과 심리가 신비하고 비 일상적이며 초현실적인 것으로 바뀌는 풍경을 감독 박기형은 마음껏 상상하고 즐기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수와 타락,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중적인 관찰의 힘이 너무 약하다.

남녀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너무 착하게만 이야기를 끌고 가려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미조의 염력이 파괴적인 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관객이 지각하는 순간, 순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주위 세상과 마찰을 빚으면서 자기와 타인을 함께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파괴적인 힘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초능력을 통한 새로운 교감과 붕괴를 다룬 은 근사하게 완성됐을 테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너무 늦게 그 비밀을 알려준다.

미조는 순수하지만 세상은 미조의 신비한 초능력 에너지를 이해하고 허락하려 들지 않으며 그 초능력을 통해서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벽이다. 미조의 염력이 왜 어쩔 수 없이 주위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악한 에너지가 돼야 했는지 영화는 나중에야 알려준다.

미조에게 매혹당한 구호의 시선에 관객의 마음을 이입시킨 초현실의 판타지지만 그 환상을 무너뜨리는, 세상에 스멀 스멀 퍼져 있는 공포감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매혹적인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매혹과 경이를 함께 주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 여주인공 윤미조의 외모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을 드러낸다.

은 바로 그런 매혹만을 서술하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개입할 수 있는 지점에 멈춰 선다.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에게 없는 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은 공포 스릴러가 아닌, 초능력에의 매혹에 집중하면서 감독 개인의 취향으로 접수한 판타지가 돼버렸다.

김영진 편집위원

기사 제공: FILM2.0 www.film2.co.kr
Copyright: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