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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누구편?…박병일변호사에 사기당한 시민의 사연

입력 | 2000-06-07 19:55:00


도대체 법은 무엇인가. 정의와 진실을 지켜주는 보루인가, 권력과 금력(金力)의 보호막인가. 한 평범한 시민이 겪은 기막힌 사연은 모두에게 이같은 물음을 던지고 있다.

강창식(姜昌植·62·강원 속초시 설악동)씨는 12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사기당해 8년간 힘겨운 법정투쟁을 해왔다. 상대는 박병일(朴炳一·65)변호사. 검사 출신에 국회의원을 지낸 법률 전문가다.

강씨가 박변호사와 거래를 처음 맺게 된 것은 81년. 박변호사와 먼 인척간이었던 강씨는 박변호사가 설악산 자락에 모텔을 완공하자 처남의 취직을 부탁했다. 박변호사는 강씨에게 아예 모텔을 맡아 경영하라고 권유했다. 강씨는 당시 11대 국회의원이던 박변호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84년 3억8500만원에 모텔을 인수했다.

그는 서울의 집 두채를 팔아 매매대금을 완불했다. 문제는 잔금을 다 치르기 전에 박변호사에게 건넨 ‘백지 메모지’였다. 강씨는 담보용으로 그 메모지에 인감증명을 찍고 서명을 해줬다.

박변호사는 그 메모지를 이용, 모텔을 박변호사가 강씨에게 명의신탁하고 5년 뒤 3억9500만원에 되사기로 했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만들었다. 박변호사는 92년 이 가짜 계약서를 근거로 춘천지법 강릉지원에 소송을 냈고 재판부는 계약서의 내용을 인정해 모텔이 박변호사 소유라고 판결했다. 강씨는 항소와 상고마저 95, 96년에 모두 기각당해 결국 12억원짜리 모텔을 빼앗겼다.

민사소송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강씨는 “사기꾼이 버젓이 걸어다니게 할 수는 없다”며 박변호사를 검찰에 고소했다. 형사사건은 더 힘들었다.

검찰은 관할문제 등을 구실로 사건을 이곳 저곳으로 보내다 불기소했다. 강씨는 당시 수사검사로부터 “항공모함과 조각배의 싸움이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강씨는 고검에 항고했으나 역시 기각돼 대검에 재항고, 마침내 대검은 97년 박변호사가 여직원을 시켜 계약서를 위조한 사실 등을 인정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드디어 서울고법은 98년 8월 박변호사의 혐의를 인정,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8년간 100차례가 넘게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을 들락거렸다. 대법원은 1년9개월 만인 지난달 30일 박변호사에게 징역 3년의 실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강씨는 ‘정의’가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박변호사는 실형 확정 하루 전 미국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검찰은 박변호사의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불구속기소했고 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리면서도 법정구속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검찰과 법원은 서로 “불구속피고인의 신병관리는 우리 책임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법은 도대체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7일 강씨가 던진 물음이다.

lightee@donga.com

▼변호사協 윤리의식 촉구▼

대한변협 김창국(金昌國)회장은 7일 실형 선고를 앞두고 미국으로 도주한 박병일(朴炳一)변호사와 변인호(卞仁鎬)씨 도주를 도운 혐의로 구속된 하영주(河寧柱)변호사 사건 등과 관련, 변호사의 윤리의식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전국 변호사들에게 발송했다.

김회장은 담화문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변호사가 문서를 위조해 남의 재산을 가로채고 사지가 멀쩡한 범인을 중병인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며 “변호사는 중요한 법률업무를 독점하고 있는 만큼 그에 상응한 사회적 책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풍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변협은 박변호사의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는 한편 하변호사에 대해서는 징계위원회에 징계를 청구했다.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