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시렌’은 일본 최고의 게임 제작자 나카무라 코우이치가 95년에 만든 게임이다. 그가 기획한 ‘이상한 던전’ 시리즈의 2편으로 슈퍼 패미컴과 게임보이를 거쳐 작년에는 윈도우용으로도 출시되었다(안타깝지만 국내에는 정식 수입되지 않았다). 말하는 족제비 곱파를 벗삼아 떠돌던 검객 시렌이 전설의 보물이 있다고 전해지는 던전에 도전한다는 게임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혁신적인 게임 방식으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입구는 분명 하나지만 던전의 지형은 들어갈 때마다 달라진다. 게다가 몬스터에게 당하건 제 발로 걸어나오건 탐험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면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레벨 1이다. 죽으면 애써 모았던 아이템이 싹 사라진다. 겨우 가지고 나온 것도 도로 갖고 들어가려면 제약이 심하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 마음대로 게임을 저장할 수가 없다. 죽으면 무조건 마을에서 다시 시작한다.
▼게이머의 상식 완전히 깨▼
이 게임은 게이머의 상식을 완전히 부정한다. 게임깨나 한 사람이라면, 중요한 결정이나 싸움을 앞두고 저장을 하는 건 기본이다. 혹시 잘못되면 다시 로드해서 새로 시작하면 그만이다. ‘떠돌이 시렌’에서는 그럴 수 없고 실패의 대가는 엄청나다. 모험에서 실패하면 레벨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아이템도 몽땅 사라진다. 그 중에서도 뼈아픈 건 칼과 방패다. 무사히 탈출하면 레벨은 낮아져도 모험 중 키운 칼과 방패는 남아 있다.
재미있는 건 피눈물나게 키운 무기를 잃는 게 아주 사소한 욕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밖으로 다 들고 나갈 수도 없는 건데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조금만 있다 써야지, 조금만, 그러다가 아차하는 순간이 온다. 별 거 아닌 아이템을 아끼다가 몇십 시간 키운 칼이 날아간다. 이쯤 되면 좌절해서 게임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주씩 그만둔다. 물론 그러다가 슬그머니 다시 손에 잡게 되지만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지른다.
▼인생살이와 닮은 이야기▼
인생에도 세이브 포인트가 없다. 다시 돌이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아주 조그만 욕심 때문에 큰 일을 그르친다. 남는 건 후회뿐이다. 자기가 한 바보짓을 떠올리며 왜 그랬을까 끝없이 묻다가 스스로를 책망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욕심나는 물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나중에 후회하게 될 지를 미리 생각해보는 경우는 의외로 얼마 없다.
좋은 게임은 플레이 내내 말을 걸어온다. 즐거운 농담 아름다운 이야기 때로는 날카로운 한마디. ‘떠돌이 시렌’의 독창적인 시스템은 다소 수다스럽게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사람마다 전부 다른 이야기다. 다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 대화가 정말 즐겁고 때로는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는 것이다.
박상우(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