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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담론]韓民族은 한 민족이다

입력 | 2000-06-13 19:17:00


참 멀고도 먼 길을 돌아왔다.

2000년6월13일 오전10시37분, 평양 순안공항, 비행기 앞에서의 조우.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걷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했을까. 사실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전10시45분.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던지자 밝은 ‘웃음’으로 화답하는 김대중대통령. 만난 지 8분만의 일이다. 그리고 동포들의 환호 사이사이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통역이 필요없는 두 정상의 만남. 예상치 못한 김위원장의 비행기 앞 마중에, 전례 없이 함께 차를 타고 백화원초대소로 동행하는 모습. 거리에서 환호하는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분단 55년에 둘도 없는 원수처럼 보였을지라도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한 땅에서 역사를 함께 해 왔다는 것은 55년쯤의 갈등도 그처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1989년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는 10년 넘게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기에 분주하다. 세계화와 정보통신혁명의 물결 속에 국경이 무너지고 민족이 무의미해진다며 떠들어대고, 살아남기 위해 블록을 형성해 힘을 합쳐야 한다며 야단들이다. 유럽 통합을 한다고 허둥대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도 연합의 구상이 난무한다.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유럽연합(EU)을 10년 내에 미국처럼 연방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도 이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 블록에 끼어야 할까,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지 않을가 걱정이 태산이다.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컬럼비아대 석좌교수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하고, 독일 헤센 평화 및 갈등연구소(HSKF) 하랄트 뮐러 소장은 다시 문명의 공존을 주장한다. 일본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다나카 아키히코(田中明彦)교수는 국가의 기능이 약화되는 ‘새로운 중세’의 도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정상의 만남은 민족의 통일이 이런 세계질서의 재편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임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새로운 세계질서 형성과정에서 두 정부의 현실적 필요성이 서로를 만나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특별함을 주장하며 아집(我執)으로 온갖 고통을 자초하는 인간일지라도, 때로는 민족이란 명분 앞에 너와 나의 벽마저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서구에서 등장했던 근대민족국가의 기원이야 길게 잡아야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의 민족의식은 단군할아버지에 닿아 있다. 학술적으로야 아무리 19세기라고 주장해도 우리 민족의식의 역사는 ‘어쨌든’ 반만년이다.

우리에게 ‘민족’은 ‘이성’이라는 빙산의 일각 이면에 반만년을 이어온 민족의 집단무의식과, 논리적 언어로는 설명불가능한 뭉클한 감정이다. 그래서 독일에서도 베를린 장벽은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는지 모른다.

통일의 타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와 국력의 효율성과 민주주의의 기반 등 온갖 이야기가 동원돼 왔지만, 두 정상의 편안한 만남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더한 설득방법은 없었다. 물론 우리는 한발 한발 가까워지기 위해 이성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 잊고 한 마디만 기억하면 된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

적어도 오늘만은 갈 길이 멀다는 걸 잊어도 좋다.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