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25분 평양 순안공항.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열여덟 계단의 비행기트랩을 걸어 내려오는 김대중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선 그의 뒷모습은 당황할 정도로 당당했다.
그러나 김대통령과의 반가운 악수가 끝난 뒤 그는 ‘예의바른 젊은이’로 돌변했다. 그는 김대통령의 꼭 1m 뒤에서 걸었다. 김대통령이 차에 타고 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왼편 뒷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화원 영빈관의 첫 정상회담에서 말했다.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습니다.” 14일 2차 정상회담에서는 “잠자리가 편했습니까” “(국수를) 급하게 자시면 맛이 없습니다”고 말하며 ‘어른’인 김대통령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위원장은 몇개의 얼굴을 가진 걸까. 그는 어느새 통 크고 유머러스하게 다시 변해있었다. 14일 목란관 만찬장에서 대통령 부인 이희호여사의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이여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그의 모습에선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연극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것 같다. 1969년 선전선동부 부부장 시절에는 가극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정상회담을 주도면밀하고 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번엔 좌중을 주도하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생산해냈다. 그는 비록 북한의 ‘창업주’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창업 1세대’인 김대통령으로부터 “예”라는 응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예측불가능하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상대에게 긴장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정부터 새벽까지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그의 특이한 생활습관도 통치술의 일환인 것 같다고 안양중앙병원 정신과 신용구(愼鏞j)과장은 말했다.
김위원장은 “사실 나는 은둔했던 것이 아니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론 은둔을 풀고 시끄러운 세상 속으로 뛰쳐나왔다. 이제는 극적인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대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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