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 평양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곳에선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만큼 놀라웠고 충격적이었다. 서울에 돌아 와서야 순간 순간들이 의미를 띠고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평양이 준 첫 번째 인상은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양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뿐만 아니라 안내원이나 평양시민들도 예외 없이 유연하고 남측 손님들을 환대하는 모습이었다.
과거와 달리 주한미군철수나 국가보안법폐지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상투적 주장은 거의 없었다. 대신 “남쪽의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누구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 많아 난처할 정도였다. 안내원들이 경제난과 식량부족 등 자신들의 약점을 인정하는 장면도 예전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김대통령이 관람한 공연도 ‘탈(脫)정치’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민속공연과 학생소년예술단의 공연은 이념적 성격이 덜하고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아리랑’같은 소재들로만 채워졌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2년 전 경남대총장 자격으로 왔는데 북측 사람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남북 교류협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다. 북측 기관지인 ‘민주전선’의 한 기자는 “기왕에 경제협력을 하려면 외국보다는 남한하고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평가도 기대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김정일위원장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한 안내원은 “(김대통령은) 과거 박정희(朴正熙)에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아니냐.
그런 점에서 호감이 간다”고 말했고 또 다른 안내원은 “김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우리와의 관계개선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인 것 같다”고 평했다.
이런 변화의 조짐들은 일순 북한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오해가 통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돼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할 때도 있었다.
특히 두 정상간의 우의(友誼)가 절정에 달했던 14일 밤의 목란관 만찬 취재과정에서 김정일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인사할 기회를 가졌던 기자는 김위원장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그는 누구인가’라고 끊임없이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탈하고, 거침없고, 유머러스하고,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에 놀랐는가 하면 그 자신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듯 ‘부잣집 외동아들’같은 아슬아슬한 행동에 마음을 죄기도 했다.
길지 않은 목격 끝에 잠정적으로 구한 답은 그가 ‘뿔 달린 승냥이도, 하늘같은 영웅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더불어 대화할 만한 정상적인 지도자”(한광옥·韓光玉대통령비서실장)라는 사실이었다.
남쪽에서 가장 우려한 전쟁도발에 대해서도 그 진의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한 안내원은 “우리는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민족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전쟁을 하면 남과 북 모두 망한다. 그런 전쟁을 우리가 왜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쪽 사람들도 ‘정치적 학습’의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정서(情緖)나 성정(性情)은 남쪽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여성안내원은 남측 수행원에게 “훤하게 잘 생기셨구만요. 마음에 드네요. 사진 한번 같이 찍읍시다”라는 농담을 던지는 등 활달하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자는 서울로 돌아오는 특별기에서 “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함께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은 또 “변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졌다.
평양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 때 인기를 독차지했던 예술단의 이진혁군(13)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남측 기자들에게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보고 또 평양에서 남쪽 손님들을 보니 좋습니다. 통일이 빨라지겠네요”라고 했다.
ym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