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는 판타지 세계에서 벌어지는 롤플레잉 게임이다. 이른바 ‘자유도’가 높은 걸로 이름이 높다.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줄거리는 있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는 하는 사람 마음이다.
착한 사람이 되어 남을 도우며 살아도 되고,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닥치는 대로 죽여 경험치를 올려도 되고, 그 사람의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고 경험치를 얻을 수도 있다. 이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은 게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발더스 게이트’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껏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게임에서도 현실은 냉혹하다. 능력이 달리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 힘도 없는 주제에 아무한테나 대들었다가는 당장 맞아 죽기 십상이고, 체력이 약하면 남들 두 대 맞아도 괜찮을 걸 한방에 치명타를 입는다.
수련을 쌓아 능력을 올려야겠지만 역시 처음에 어떻게 태어나느냐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캐릭터의 초기 능력치는 주사위를 굴려서 결정된다. 맘에 안 들면 다시 하고, 그래도 아니면 또 다시.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뻣뻣해질 때까지 평균 네 시간 정도 노력하면 맘에 드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수퍼맨을 탄생시켰어도 무협지 주인공같은 천하무적은 아니다. 남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출발했어도 특히 초반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게임을 시작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귀족이나 부자들은 유난히 재수가 없다. ‘가서 내 바지나 빨아와라.’ ‘뭘 훔치려고 기웃대냐?’ 기분 같아서야 다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평판이 나빠져서 물건 하나 사기도 힘들고, 도시의 경비병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게 된다.
‘일단 참자. 맘에 안 드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있다.’ 뻔히 사기꾼에 나쁜 놈인데도 동료가 되기로 한다. 길에서 출몰하는 강도나 괴물들이 무서워서다. 이런 놈들과 동료가 되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비위를 맞춰야 한다.
이러다 보면 ‘앗’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게임 속에서나마 자유롭게 살려던 거 아니었나?’ 믿는 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 지겨운 캐릭터 메이킹 작업을 몇 시간씩 한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여전히 남의 눈치를 보고 있다. 좀 더 편하게 진행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바라지 않는 일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니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은 백만 명에 한 명밖에 없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 때문에,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그러니까 철이 들었기 때문에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돈이나 명예를 실제 얻을 수도 없는 게임에서까지 똑같은 짓을 하는 건 단순히 몸에 밴 습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런 건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박상우(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