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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의 세상스크린]더 이상 슬픈 명절 없었으면…

입력 | 2000-06-18 19:35:00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저는 공직생활을 오래 하신 보수적인 아버지의 눈에 늘 안차는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저를 군인이나 외교관으로 키우고 싶으셨던 아버지는 제가 상당히 미우셨나 봅니다. 고등학교 3년을 연극부 활동을 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화를 본답시고 경복궁옆 프랑스문화원을 기웃거리고, 새 영화 개봉 때면 극장에서 살던 저와 아버지의 갈등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극에 달했습니다.

▼난 선친묘소라도 찾아볼수 있지만▼

공부 잘했던 작은 형은 그토록 공대를 가고 싶어했지만, 당시 보건사회부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의사가 좋아 보이셨던지 작은 형을 강제로 의대에 입학시켰고 의사를 만드셨습니다. 작은 형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말씀을 따랐고 지금은 수원에서 제법 신망있는 개업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작은 형은 아버지의 지난날 강압을 감사하게 느끼고 의사로서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 차례였습니다.

중앙대 영화과에 가겠다고 하자, 처음엔 정규대학이 아니라 무슨 학교 재단에서 심심풀이로 운영하는 학원같은 곳인 줄 아신 모양이었습니다. 진노하신 아버지는 “우리 집에 딴따라가 나왔다”고 탄식하셨고, 회초리도 많이 드셨습니다.

그러던 중 배우되길 찬성하셨던 어머니의 설득 때문이었는지, 그저 큰 한숨만 쉬며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배우가 된뒤 나름대로 성실하게 생활하자 아버지는 딴따라도 일반사회인처럼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셨고 마침내 “훌륭한 예술가가 되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나중엔 제 영화가 개봉될 즈음이면, “손님이 많이 들어야 할텐데…”라는, 충무로에서 통하는 표현까지 써가며 불안해 하셨고, 개봉날 극장에 전화를 걸어 잘 되지도 않는 20대 목소리를 흉내내어 “박중훈 나오는 극장이죠? 지금 가면 표 살 수 있나요?”라고 묻고, “매진”이라는 대답이라도 들을 때면 “중훈아! 매진이란다”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던 1999년 설날이었습니다. 15대 종손인 아버지는 16대 종손인 큰 아들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어머니와 둘이서 사시는 본가로 돌아오신 뒤 당신의 아내 손을 꼬옥 잡은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를 선산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난 뒤 지금까지 우리 가족 모두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맺힌 한 같은 건 없는 복받은 가족인데도 말입니다.

칠순까지 건강하게 살다 행복하게 떠나셨기 때문에 남들에게 호상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가족 한사람을 못만난다는 게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일 줄 몰랐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아버지를 안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것과도 바꾸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운 가족 이번만은 꼭 만나길▼

그러나 이 말을 세상에 대고는 못하겠습니다. 아니 자격이 없을 것같습니다. 저야 묘소 앞에 갔다가 금방 저녁에 올 수 있지만, 남과 북으로 갈려 50년을 넘겨버려 통한으로 가슴에 피멍이 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가족을 부둥켜 안을 수 있는 가슴벅찬 현실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났다면 산소앞에서 통곡이라도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남북정상에게, 겨레에게, 하늘에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이번만은 꼭꼭 이뤄지게 해주십시오.” 더 이상 깊게 패인 촉촉한 눈으로 슬픈 명절을 보내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박중훈joonghoon@seromesof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