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청의 예고에 따르면 이번 주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아시아 몬순지대에 속한 한반도는 여름철이면 이 장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남중국해의 수면이 뜨거워지면서 생긴 다량의 수증기가 때맞춰 불어오는 계절풍(몬순)에 실려 북상하다가 더 이상 무게를 가누지 못해 비를 뿌리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장마가 홍수까지 동반해 우리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주지만 이 땅의 농작물은 이 때 내리는 비 덕분에 꽃을 피우고 또 열매를 맺으니 이를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의 의식주 문화는 장마가 끼어 있는 고온다습한 이 여름과 잘 사귀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문이 많고 벽이 얇은 집, 몸에 밀착되지 않는 옷, 국물이 흥건한 음식 등이 그걸 말해 준다.
주위의 땅에 뭇 생명을 자라게 하는 태평양은 그 자체가 생명의 텃밭이다. 난류와 한류가 함께 흐르는 데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초와 개펄이 많으며 바다로 흘려드는 강 또한 영양분이 풍부해 물고기가 많고 종류도 다양하며 맛 또한 좋다. 그래서 우리는 초지(草地)가 넉넉치 못 해 자칫 부족하기 쉬운 동물성 단백질을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로 보충했다. 생선은 또 우리의 주식인 밥과도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실로 태평양의 에너지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종 풍부한 태평양 동아시아인 단백질 공급원▼
그러나 동아시아인들은 바다를 항해의 터전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라의 장보고, 명(明)의 정화(鄭和)가 있긴 하나 그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될 뿐이다. 해풍이 잦고 뱃길이 험해서 항해가 여의치 않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바다를 농사 짓는 땅과 같이 생명의 터전으로 보았지 결코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서구문명이 태어나 자란 지중해는 어로의 터전이 아니라 줄곧 항해, 나아가 해상무역의 활동무대였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라는 세 개의 대륙으로 둘러싸인 지중해는 내해(內海)인 탓에 바람은 물론 해류도 개펄도 없으며, 수초 또한 자라지 않는다. 그곳으로 흘러드는 강이라는 것도 석회석이 다량 함유되어 하얀 거품이 이는 생명 없는 단순한 물의 흐름일 뿐이다. 이런 곳에선 물고기가 제대로 자랄 수 없고 그나마 잡힌다 해도 별다른 맛이 없다. 자연히 어업보다는 항해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데, 서구의 역사는 실제로 그런 코스를 밟아왔다.
▼'생명없는 물' 지중해 고대부터 교역 무대로▼
알파벳의 조상이 되는 ‘페니키아 알파벳’을 해상무역에 사용해 큰돈을 벌었던 페니키아, 그리고 그들이 북아프리카에 해외식민지로 개척한 카르타고, 에게해의 상권을 오랫동안 지배한 아테네, 지중해를 자기네 안마당쯤으로 생각했던 로마제국, 육류의 장기보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후추 무역으로 중세시대 지중해의 강자로 행세한 베네치아, 그리고 한때 이런 베네치아에 감히 맞서려 했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는 오스만 투르크제국 등. 이들은 하나 같이 지중해 연안국가로 어업국가가 아니라 항해대국이었다. 지중해는 어업이 아니라 항해의 터전으로서, 주위의 민족들에게 힘과 부의 원천이 돼 주었던 것이다.
런 유럽도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중해로부터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항해를 위해서였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오랫동안 유럽 해상활동의 중심지였던 지중해와는 절연된, 대서양을 끼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이었다. 그런 포르투갈이 일약 해양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왕 엔리케 덕분이다. 그는 ‘카라벨’이라 부르는 범선을 제작케 하고 항해기법과 장비를 개발했으며, 또 미지의 땅 아프리카 등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 원양항해를 크게 진작시켰다. 그 바탕 위에서 희망봉을 주항한 바르톨로뮤 디아스,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브라질을 발견한 알바레스 카브랄 등 대항해가들이 태어났다.
런데 재미있는 것은 엔리케 왕자가 먼바다로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동기다. 유럽인들은 초지를 이용해 양을 길렸으나 목초가 부족한 겨울에는 그 대부분을 도축하여 그 고기로 겨울을 났다. 유럽의 의식주 문화는 이 겨울을 슬기롭게 지내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냉장시설이 없던 그 시절 고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산패를 더디게 하면서 맛이 살짝 간 고기의 냄새도 제거해 주는 후추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유럽에서는 나지 않고 오직 동남아시아에서만 생산되었기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베네치아가 아랍상인과 손잡고 독점하여 판매하고 있었으나 값이 너무 비싸서, 지중해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사 먹을 처지도 못 되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대양을 건너 직접 후추생산지로 달려가는 길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엔리케 왕자가 “동방에는 ‘지팡구’라 불리는 황금의 섬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귀한 후추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기록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었으니 대항해사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위기는 곧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벤처기업가인 셈이다. 포르투갈이 대륙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쪽 끝에 있어 불리하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에 가까이 있어 항해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오랜 준비기간을 참고 견딜 줄도 아는 인내심도 갖고 있었다.
▼대혀양 돌출부 포츠투갈 15세기 원양항해 개척▼
포르투갈은 이런 엔리케의 위업을 기려 그의 서거 500주년이 되는 지난 1980년 그가 배를 띄워 보냈던 리스본의 테조 강변에 ‘발견기념탑’을 세웠다. 16세기 마누엘 왕이 인도항로를 개척한 다 가마를 위해 세운 백색의 귀품 있는 벨렝탑과 같이 백색으로 된 기념비에는 카라벨을 큰 그림으로 만들어 뱃머리에다는 손가락으로 먼 수평선을 가리키고 있는 늠름한 엔리케의 모습, 그리고 “보라, 유럽의 끝에 포르투갈이 있다. 거기서 대지는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며 사나이들을 바다를 향해 떠나도록 부추겼던 민족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모습도 함께 새겼다.
그렇다고 포르투갈인들만의 힘으로 대항해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의 성공 뒤에는 일찍이 초원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한 바 있는 유목민들의 힘이 있었다. 서아시아 일대를 무대로 캐라반 무역에 종사하며 망망한 사막을 지나는 동안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천측항법(天測航法)을 터득했고, 소수의 인원으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기에 순간적 기지와 강인한 정신력도 갖고 있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는 믿음으로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사막과 바다 어디든 달려갔던 그들은 포르투갈의 대항해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 중에서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시 길 안내를 맡았던 항해사 아흐마드 이븐 마지드는 기록에도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다. 그는 뛰어난 기술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위기가 닥쳤을 때에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 노릇까지 해냈다.
땅 위에 길을 건설한 자는 바다 위에도 길을 낸다.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에서 누구는 그것을 먹거리의 터전으로 삼고, 다른 누구는 이동의 무대로 삼는다. 그것은 바다라고 해서 다 같은 바다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권삼윤(문명비평가)tumi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