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이 좋은 작품에 왜 제목이 없을까?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 이게 제일 좋은데….”
음반점에서 만난 지인이 매장에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교향곡 A장조를 따라 흥얼거리며 하는 말. “그러게 말예요. ‘바커스의 춤’이라던가 뭐 그런 제목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제목이 없다는 게 무슨 대수랴. 그렇지만 ‘음악애호가들’이나 ‘FM애청자들’이 뽑은 인기곡 상위는 항상 제목붙은 곡이 점령한다. 교향곡만 따져보아도 베토벤의 ‘운명’ ‘전원’ ‘합창’, 모차르트의 ‘주피터’,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등 상위곡 거의 전부가 제목이 있는 곡들이다. 제목 없는 작품의 숫자가 훨씬 많은 데도.
새삼 제목 얘기를 꺼낸 이유는, 한번 기자 나름대로 좋아하는 작품에 제목을 붙여보고 싶어서이다.
▼나대로 붙여본 '바커스의 춤'▼
교향곡만을 놓고 이야기하면 이런 식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무궁동’,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는 ‘예언자’, 말러의 교향곡 9번은 ‘고별’. 물론 공연장에서 통용되지 않는, 기자 책상머리에서만 유효한 제목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악장마다 시종일관 변함없는 리듬과 속도가 특징이다. 주제가 바뀌고 악상의 고조와 침잠(沈潛)이 반복돼도 태연하게 같은 빠르기로 굴러간다. 첫머리에서 커다란 공을 톡 굴려놓으면, 그 공이 계속 굴러 논둑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며 세상 구경을 다 하는 것 같다. 산맥이 나와도, 빌딩숲이 나와도 둥실 떠올라 똑같은 속도로 행진을 계속한다. 마찰과 저항의 물리 법칙을 잊어버린 끝없는 운동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끝없는 운동, 즉 ‘무궁동(無窮動·Perpetuum Mobile)이라는 이름을 상상해본 것이다.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작곡가의 ‘경건함’이 뚝뚝 묻어나는 작품이다. 1악장은 마치 예언자가 광야에서 수행하며 자신의 길을 깨달아나가는 것 같다. 2악장은 예언자의 고요한 명상을, 3악장은 그가 세상에 나아가 진리를 설파하는 모습을 담은 듯 하다. 노년에 이르도록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성당 오르가니스트로서 신을 찬미하며 평생을 보낸 프랑크였기에, 만년의 회심작으로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교향곡 형식에 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앞에 이야기한 두 제목이 기자의 순수한 ‘창작품’ 인데 비해, 나머지는 세간에서도 인정할만한 제목들이다. 베토벤의 ‘7번’은 일찍부터 신화의 바커스를 연상시키는 활달함과 천의무봉함이 있다고 이야기돼 왔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가리켜 ‘춤의 신격화’라고 말했다. 말러 9번 교향곡의 경우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뒤 작곡한 작품으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고별’과 유사한 동기가 전곡을 수놓고 있다.
▼그 자체로 듣는것도 좋지만…▼
글을 마치려 하니 걱정이 든다. 예부터 “음악은 그 자체로 즐겨야 하며, 문학적 줄거리나 제목 등을 붙이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일이다”라고 주장해온 음악 순수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있는 제목도 떼어내고 싶은 판에, 기자가 없는 제목도 붙이려 드니 ‘클래식 얕게듣기’를 획책하는 짓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비난받는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최소한 낭만주의 시대에는 청중이 음악을 들으며 자기만의 상상을 덧붙이기를 많은 작곡가들이 바랬을 겁니다. 선생님도 좋아하는 곡에 자기만의 제목을 붙여보시면 어떨까요. 그것이 혹 첫사랑의 연인 이름이든, 좋은 인상을 받았던 여행지의 이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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