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작정하고 시작하는 사랑은 없다.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들은 만나기도 전에 미리 사랑의 모습을 짐작하겠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풀려 나가지 않는다. 자취를 남기지 않고 파놓은 함정처럼, 느닷없이 닥쳐 오는 인연.
처음 만난 순간 온 하늘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리라는 환상 대신 그 인연을 단단하게 묶어 놓는 것은 상처로 남은 감정의 마찰과 지워질 수 없게 쌓아온 기억이다. 는 이처럼 모르는 사이에 그물처럼 얽혀 버린 사랑을 엮어 간다. 그리고 다툼과 불신 속에 커 나가는 의 로맨스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보다 더한 재미를 준다.
영화는 정반대의 세계에 속해 있는 두 사람을 따라 간다. 순진한 잡지사 기자 샘과 집을 나와 혼자 사는 10대 소녀 아진. 낙천적이고 다감한 샘은 험한 일을 당해본 적 없어 무조건 세상을 믿는다. 그러나 고작 열 아홉 살인 아진은 햇빛을 피해 환각제에 취해 산다. 사랑보다 남자들의 '흑심'을 더 먼저 알아 버린 아진에겐 기댈 곳이 없다. 그녀 스스로 읊어 내리는 자신의 이야기에는 희망 없이 어둠만이 가득하다. 샘은 살아가기를 포기해 버린 아진에게 화가 나지만 그녀를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는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의 관습들을 짜깁기해 놓은 영화다.
거리를 헤매던 소녀가 한 남자에게 구원 받고 행복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의 마음을 울려 왔다. 서로를 파괴의 지경까지 밀고 가는 갈등 역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그러나 는 낯익으면서도 진부하지 않다. 반환 이후 암담한 그늘 속에 가라앉은 홍콩의 풍경이 틈틈이 삽입되는 까닭이다.
한밤의 클럽을 메운 청소년들은 아진의 무기력한 삶을 공유한다. 뒷골목만 짚어 다니는 아이들. 가장 독한 술을 골라 만든 칵테일을 마시면서 미친 듯 춤추는 그들에게서는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체념이 묻어 난다.
그러면서도 는 묘한 활기가 넘친다. 주먹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아진의 깡패 오빠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통곡하는 아버지를 향해 "우는 거야, 주정하는 거야"라고 천연스럽게 핀잔을 준다, 코미디의 흔적이 멜로를 밀고 들어 오면서 영화가 신파로 처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아진과 샘이 엮는 에피소드도 아기자기하다. 세상을 믿지 않아 오히려 계산 없이 자유로운 아진은 너무 착해 이용만 당하는 샘을 씩씩하게 돕는다. 투덜대면서도 아진의 방을 열심히 청소하는 샘의 모습, 도둑질을 하면서 깔깔대는 아진과 친구들의 천진함도 영화를 발랄하게 끌고 간다. 는 온갖 잡다한 찌꺼기들을 긁어 모아 썩 괜찮은 모자이크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중심 없으면서도 정감 가는 그림은 의 감독 이동승에게는 익숙한 길이다. 에서 포르노 배우를 향한 성적 환상에 빠져 뒤죽박죽으로 꼬인 한 감독의 이야기를 통해 홍콩 영화계를 비판했던 그는 이번에도 깊이 있지는 않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다. 동시에 억제할 수 없는 생기가 넘쳐 나며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는 의 순진한 믿음도 함께 한다.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는 참 귀여운 러브 스토리를 선물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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