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살던 집에는 작은 책방이라는 방이 있었어. … 꽃과 잡초가 뒤섞여 있는 뜰처럼 많은 책이 가득 차 있었지. …여름이면 먼지가 뿌옇게 앉은 유리창으로 햇살이 비치고, 그 한줌 햇살 속에서 금빛 먼지가 어른어른…’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작은 책방’의 서문을 읽어 내려갈 때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소녀가 책더미 위에 앉아 고개를 처박고 열심히 무언가를 읽는 이 동화의 삽화는 언제나 선명히 기억난다. 내게 책 읽기가 뭔가 신비하고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상상속에만 있는 이 ‘작은 책방’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저초등학교의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마음 속의 ‘작은 책방’을 떠올렸다. 환한 햇빛을 받아들이는 넓은 창과 아이들 키에 맞춰 어른 가슴 높이 정도에 차는 키 작은 서가가 다정한 교실. 뒷칠판에 내걸린 십진분류법에는 순수과학인 400번대에 우주·공룡이, 기술과학인 500번대에는 로봇이 큰 글씨로 씌여져 있다. 공룡과 로봇에 열광하는 또래 아이들의 도서관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분류법을 볼 수 있을까.
▼학부모들이 도서실 운영▼
성저초등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95년. 도서관은 99년 9월에야 문을 열었다. ‘학교가 책 읽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몇몇 학부모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성저초등학교 역시 도서관없는 신도시 학교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집보다 더 좋은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여름 내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낡은 교실을 밝게 페인트칠하고 책을 모으고 개관 후에도 30명의 어머니들이 번갈아 도우미로 도서실 운영을 지원해온 성과는 무엇일까.
전교생 2727명의 이 학교에서 요즘 하루 평균 책을 빌려가는 아이들 수는 200명에 육박한다. 한달에 40권 넘게 책을 읽는 아이들도 있다. 작은 책방 하나가 컴퓨터게임, 비디오 일색의 아이들 생활에 괄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게임대신 책보는 아이들▼
그러나 학부모들의 걱정은 정작 지금부터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좋은 책을 많이 가져다놓기만 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속적으로 독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아이들을 지도하는 전문 사서교사가 없으면 책이 아무리 많아도 무용지물이 되겠더군요.”(학부모 이숙인씨)
교육부에서 발간한 99년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전국 5544개 초등학교(분교 제외) 중 독립건물이든 교실이든 도서관을 갖고 있는 학교는 전체의 70%가 안되는 3469개교. 그 중 정식 발령을 받은 사서교사가 있는 학교는 단 4개다. 지원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부가 채용하지 않아서다. 올들어 경기도 고양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으로 사서 100명이 초등학교에 채용됐지만 대부분 공공근로 형태의 임시직이다.
아이들한테 굳이 전문적인 사서가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구 유라초등학교의 사서교사 안현정씨(25)는 이렇게 답한다.
“3년전 제가 부임했을 때는 도서관 문이 열쇠로 잠겨 있더군요. 아이들의 첫 질문이 ‘선생님 여기 들어가도 돼요? 돈 안내고 봐도 돼요?’였어요. 지금은 다른 공공도서관에 가서도 학교에서 배운 십진분류법으로 척척 책을 찾는 아이들이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작은 책방’의 기억 하나 만들어줄 수 없는 어른들이 책 읽으라는 훈계는 왜 하는 것일까. 그런 사회가 도대체 지식기반의 정보화입국은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