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이 ‘불국토’라 불렀던 토함산. 그 계곡의 물이 동해로 빠져드는 곳에 신라 최대의 석탑인 감은사 동 서 석탑이 아직도 그때의 모습을 하고는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적당히 간격을 벌려 서 있는 3층 구조의 이 쌍둥이 석탑에선 어떤 가식이나 군더더기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오직 단단한 골격만을 보여주기에 강건하고 담백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현대 여성들이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것도 저런 슬림(slim)형이 건강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관심은 오히려 금당(金堂, 본존불을 모신 불당)터와 쌍둥이 탑이 만들어 내는 가람의 공간배치에 있다. 금당 하나에 탑이 두 개인 소위 ‘쌍탑1금당식’ 공간배치는 우리 나라에선 감은사에서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불교 전래 직후 세워진 청암리 사지(6세기, 고구려, 평양)와 상오리 사지(6세기, 고구려, 대동) 그리고 9층 목탑으로 유명한 황룡사(6세기말, 신라, 경주) 등은 1탑3금당식이었고, 백제의 미륵사(7세기초, 부여), 신라의 분황사(7세기초, 경주) 등은 1탑1금당식이었는데, 7세기말 이 감은사에 와서 금당 하나에 탑이 둘인 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가람의 공간구조 변화는 우리 나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7세기에서 8세기까지 한 중 일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하나의 문화현상이었다(중국에선 7세기초, 우리 나라에선 7세기말, 일본은 8세기 중엽).
초기에 나타났던 1탑3금당식은 탑이 금당을 거느리고 있는 구조로서 탑이 가람의 중심에 자리잡았기에 금당은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기 또한 금당을 압도했다. 이에 비해 1탑1금당식에선 탑과 금당이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 일본의 호류지(法隆寺)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탑과 금당은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경쟁관계였는데, 어쩐 일인지 그런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금당이 곧 탑을 압도하면서 가람의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밀려났던 탑은 금당을 좌우에서 수호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이 감은사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바로 쌍탑1금당식 구조였다.
원래 불탑(산스크리트어로는 이를 Stupa라고 하는데, 사리탑이란 뜻이다)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모시기 위해 조영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자연스레 불타의 인격적 불멸성, 다시 말해서 역사적 인물인 석가는 결코 죽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땅에 세워진 산치대탑이나 다르마라지카(Dharmarjika) 등에서 보듯이 무덤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이런 불탑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상륜(相輪)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 옛날 인도에서 귀인의 상징으로 쓰였던 우산 세 개를 아래 위로 세워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상륜은 고귀함과 함께 수직상승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부활과 승천을 예비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산의 살대처럼 끝은 아래로 살짝 휘어져 있다. 그것은 끝없는 비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그 선도 투박한 직선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기에 부여의 정림사 5층석탑에서 보듯 느낌이 부드럽다.
불탑은 이런 수직상승형상의 상륜으로 하여 도저히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무덤과 생(生)의 의지라는 두 가지 요소를 담아낸다. 하긴 석가도 “존재의 모든 요소는 고뇌다. 고뇌의 근본은 욕구와 욕망이며, 삶에 대한 욕망까지도 고뇌의 원인이 된다”며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했으니 삶과 죽음에 무슨 경계가 있겠으며, 무덤이라 해서 삶의 의지를 나타내지 못할 이유 또한 없으리라. 아무튼 석가는 이 불탑으로 인격적 불멸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탑의 예배자는 그만큼 불타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불탑은 실용적 기능이 없지만 내면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초기의 불교는 불사리 신앙에 투철했고, 절은 당연히 탑 중심이었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불상숭배를 앞세운 대승불교가 중국 불교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탑이 추구하는 열반사상으로는 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 살아있는 영원한 불성(佛性)을 받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었다. 영원한 불성과 현세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대승불교는 종래의 불사리 신앙에서 벗어나 비로자나불, 미륵불,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등 부처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내었고, 또 이들을 불상으로 조형화 했다. 이런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축조했는데,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선종 등이 동시에 힘을 뻗어갔던 수(隋)말 당(唐)초가 그 극성기였다.
신라는 중국의 변화에 초연할 수 없었으므로 중국의 예에 따라 쌍탑1금당식 가람구조를 갖게 됐다. 감은사의 동서 석탑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7세기 동북아에 불어닥친 불교사상의 거대한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중국식 가람 공간구조를 따랐으되 탑의 형태나 축조 미학에서는 독특한 장기를 펼쳐 보였다. 그 결정체가 불국사 앞마당에 서서 ‘비대칭 속의 대칭’을 보여주는 석가탑과 다보탑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 이후 이만한 불탑을 세우지 못했다. 토함산 중턱의 석굴암에서 보듯 신라는 곧바로 ‘불상의 시대’를 화려하게 열어갔고, 고려는 ‘불경의 시대’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탑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불상과 탑이 혼용된 듯한 사방불(四方佛)이 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탑은 불교의 역사와 같이 했다고 하여 불교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도 뾰족탑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절에는 탑 이외에 금당, 무설전 등 여러 축조물이 있으나 교회는 오로지 탑 하나만 있기 일쑤니까 교회야말로 탑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끝없이 수직상승 하려는 형상을 하고 있는 고딕성당은 뾰족탑이란 말이 상징하듯 탑의 화신인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탑이라 부르지 않는다.
탑의 형상을 하고 있는 교회도 불탑처럼 무덤으로부터 출발했다. 예루살렘의 성분묘교회는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고,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또한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어졌으며, 수많은 교회가 지하에 납골당을 두고 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는 기독교나 육신의 죽음을 해탈,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 본 불교는 모두 죽음에 대한 초월과 극복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다같이 탑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기독교의 탑과 불교의 탑은 형태가 다르다. 죽음에 대한 시각 에 차이 때문이다. 교회의 탑은 까마득하게 높고 또 뾰족하다. 승천의 의지를 표상하는, 직립 형상의 십자가를 방불케 한다. 승천은 영원한 삶을 뜻하는 것이니 기독교에 있어서 죽음은 불교의 열반과는 달리 존재의 무화(無化)가 아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유한한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무한, 영생에의 의지는 현실세계에선 미완의 꿈일 뿐이다. 유럽에서 종교적 열망이 가장 강하게 타올랐던 중세를 풍미했던 고딕(Gothic) 성당이 끝없이 수직상승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미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영생에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선 열반을 통해 삶이 완결된다고 믿었기에 (열반은 윤회의 고리가 끊긴 상태다) 부활이나 승천이란 개념이 태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뾰족탑 또한 생겨날 수 없었다. 상승하는 듯 하면서도 그 끝은 언제나 지상을 향한다. 열반상이 수직의 십자가 형상이 아니라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삼윤(문명비평가)tumi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