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지로 만들어진 수십개의 머리 없는 불상 위에 온갖 민족과 인종의 머리들이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져 있다. 머리는 아직 몸과 하나가 되지 못해 공중에 떠 있으나 서로가 하나 되기를 원하기에 자석으로 연결돼 서로를 지향한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도 몸을 따라 움직이고 몸이 움직임을 멈추면 머리도 제 자리를 찾는다.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주. 설치예술가인 그가 선재아트센터에 전시해 놓은 이 ‘헤드리스’에는 동양 불상의 몸통과 서양장난감의 머리, 진시황릉의 토용(土俑)을 연상시키는 색채와 질감, 그리고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스폰지와 플라스틱이 결합돼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내는 미학은 이 모든 이질성의 ‘공존’, 그리고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어울림’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신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생산물은 이미 존재하는 유(有)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어울림’의 산물이다. 검은 커피와 흰 크림의 단순한 ‘섞임’이 만들어 내는 비엔나 커피의 신비한 색채에 놀라워 했던 사람이라면, 갖가지 음악을 뒤섞어 정제해 낸 단순한 음의 반복으로 인간의 몸과 영혼에 리듬을 불어넣는 테크노에 몸을 실을 수 있다.
초록색 배추 이파리가 세계 곳곳의 식탁에서 빚어내는 맛과 색의 조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온갖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유목민의 나라 카자흐스탄의 거리를 보고 신기해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를 세상의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인간들은 자신의 특수성을 일반화하려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 나와 같으면 옳고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다. 나와 같으면 동지요, 나와 다르면 적이다. 인종차별 민족차별 지역주의 학벌주의…. 모두가 ‘나’의 인정투쟁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나’가 있기 마련.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포퍼처럼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반증가능성의 개방을 주장하는가 하면,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처럼 대상 세계의 변경가능성에 대한 개방을 통해 ‘나’의 아집을 뚫으려 하기도 한다.
세상의 겨우 한 귀퉁이를 아는 인간이 또 다른 한 귀퉁이를 아는 타인들과 아웅다웅하는 세태를 비웃었던 장자는 자신의 관점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일어날 비극을 이렇게 비유했다.
“남해의 임금 숙과 북해의 임금 홀이 중앙의 임금 ‘혼돈’을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귀 코 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숨쉬고 먹는데 혼돈은 그것이 없으니 답답할 것이다.’ 숙과 홀은 혼돈에게 하루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 주었다. 일곱째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세상 모든 것이 일곱 구멍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뒤범벅을 해 놓아서는 그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감당하기 어려운지라, 섞음에도 ‘어울림’의 질서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돈된 질서를 좋아했던 공자의 경우에도 ‘길(道)’은 시에서 시작하여 예를 거쳐 음악에서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세상의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 만들어가는 사회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기 쉬운 예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높낮이의 음과 온갖 악기들의 질감이 어울림의 미(美)를 만들어 내는 음악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음과 하나의 음색은 소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타인을 희생시키며 전체 선율로부터 ‘나’만을 특별히 분리해 내려는 시도가 낳는 추악함은 지금도 이 나라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분쟁과 갈등의 현장에서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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