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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의 세상스크린]내 주장은 '신념' 남 주장은 '아집'?

입력 | 2000-06-26 19:34:00


1989년 한국영화 평균제작비가 2억원쯤 하던 시절, 당시로서는 최고 출연료인 1700만원을 받고 ‘내사랑 동키호테’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는 서울관객 3만명이라는 저조한 흥행성적을 내며 2주일만에 간판이 내려졌습니다.

곧이어 ‘우묵배미의 사랑’ 출연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작품과 역할이 근사해 쾌히 응했고 저와 영화사는 출연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원하시죠?” “1700만원이요.” “왜요?” “바로 전 작품에서 1700만원을 받았으니까요.” “그 영화가 무참히 깨졌는데? 1500만원만 받으세요.” “깍일 수는 없죠. 1700만원 아니면 못해요.” 1차 협상이 결렬되고 다음날 2차 협상이 시작됐습니다. “아직도 1700만원을 고집하세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어제 우리가 회의를 했는데 당신에겐 1500만원도 많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300만원만 받던가 아니면 마십시오.” “그러세요? 1700만원에 저를 쓰시던가 아니면 마십시오.”

같이 튕기고 집에 돌아온 저는 영화사의 굴복을 기다리며 초조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간간이 걸려오는 친구들의 전화 말고는 벨조차 울리지 않았고, 영화사에서 다른 배우들을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출연료 협상 내고집만 부려

저는 그제서야 주제파악을 하고 단숨에 영화사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출연료가 깍이는 게 정말 싫어 궁여지책을 냈습니다. “출연료를 안받겠습니다. 대신 개봉하는 날, 제가 17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정확하게 1700만원을 주십시오. 그 밑으로 줄거면 안줘도 좋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론 센 척했지만 속으로는 떼일까봐 촬영내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드디어 영화 개봉날, ‘모가드 코리아’의 서병기 사장님은 1700만원을 주셨습니다. 참 좋은 영화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그 일 이후 겁이 나서 출연료를 높게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제 상품가치보다 한두단계 낮춰 출연료를 부르는 나름대로의 겸손을 보이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연료 협상이 1∼2분이면 끝나는 순조로운 배우로 충무로에 알려져 있지만, 아무도 제 출연료를 적다고 보지 않습니다. 과욕은 안부려도 적당히 받을 만큼 받아가는 배우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 나름의 용기를 몰라주는 영화사를 섭섭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이게 정상인 건지 가끔 헷갈립니다.

▼"희망을 현실로 착각 말자"

제 친구 중 한 명은 자기 아들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천재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섯 살 밖에 안됐는데 한글과 알파벳을 읽을 줄 알기 때문이랍니다. 제 아들은 다섯 살인데도 글을 압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차마 그 친구 앞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지킬 수 있으면서도 자기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종종 객관적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 희망을 현실인양 착각해서 일까요? 그래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신념이자 정의이고 자기의 시각과 틀린 남의 생각은 아집이자 집단이기주의처럼 비춰지는 걸까요? 남들이 보내주는 박수와 환호, 갈채를 먹고 사는 배우인 저는 어디까지가 저의 허상이고 실체인지 혼돈스러워하며, 걸리면 죽는다는 불치의 신종병마인 ‘왕자병’과 오늘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박중훈 joonghoon@seromesof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