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허준의 무덤을 찾은 의녀 예진이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자 그녀의 어린 몸종이 묻는다.
예진이 대답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흐르는 물과 같은 사람이었느니라. 내가 죽어 물이 된다면 그를 만나 ‘나를 사랑했는지’ 물어보리라.”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연상케하는 이 말은 노자사상과 밀접했던 허준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면서 보이지 않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물처럼 살아왔다는 뜻이다.
올해초 높은 시청률로 화제가 됐던 도올 김용옥의 TV 강좌 ‘노자와 21세기’의 주제가 노자의 도덕경이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러나 지난주 대단원의 막을 내린 허준이 노자와 도가(道家)사상의 대가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준의 저서 ‘동의보감’의 바탕에는 도가의 양생술(養生術)과 ‘허(虛·비움)의 철학’이 깔려 있다. 그는 서문에서 “도가는 심신의 전체를 자세하게 다루었고, 의가(醫家)는 거칠게 구체적인 부분만을 다뤘다”고 밝히고 있다. 총론에 해당하는 ‘신형편’에서는 태을진인 손진인 구선 포박자 등 노자와 같은 도가의 달인들의 건강술과 황정경 청정경 등 도가의 서적을 자주 인용했다.
허준을 내의원에 추천, 어의(御醫)의 길로 인도한 미암(眉巖) 유희춘의 문집 ‘미암일기’에는 허준이 미암에게 도덕경을 선물한 사실이 나올 정도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유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허준의 도가에 대한 태도는 그가 양반의 서출이라는 출신성분과 관련이 깊다.
그는 관직에서 중인 신분으로 정일품에 오르는 ‘신분파괴’를 이룬 것처럼 의학사상에서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지 않고 실용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적인 자세로 동의보감을 저술했던 것이다. 032-651-7823
손영태(부천 명가한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