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를 울리는 재앙신의 분노. 숲과 들을 가르며 질주하는 금빛 사슴 모습의 재앙신은 길을 막는 모든 것을 삼키며 인간을 징벌한다. 비디오로 보기에는 아까운 스펙터클 의 한 장면.
그러나 이제 곧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안이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개봉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개방 대상에 해당하는 애니메이션은 를 포함한 25편 내외. 현재 국내 영화사가 판권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은 등 10편이 넘는다.
3차 개방에서 애니메이션이 허용될 것인지 불투명했기 때문에 당장 개봉할 수 있는 작품은 없다. 그러나 몇몇 작품이 올해 안 개봉을 목표로 심의신청 등 개봉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튜브 엔터테인먼트의 전희영 씨는 "가 올해 안에 개봉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극장판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대원동화의 황정열 과장 역시 "빠른 시일 내에 를 개봉할 것이며 문화관광부에 심사를 요청해 놓았다"고 말했다.
이들 중 작품과 흥행 양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역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를 중심으로 한 지브리 스튜디오는 등 인간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을 친근한 캐릭터로 표현해 왔다.
지브리 스튜디오 창립 작품이기도 한 는 지브리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불의 7일간'이라는 전쟁 때문에 파괴된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공존을 모색하는 진지한 사색을 보여 준다.
동시에 깊이 있는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 이상향을 꿈꾸는 미야자키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으로 일본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다카하타가 함께 하는 지브리는 애니메이션의 철학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 준다.
그러나 지브리는 이러한 철학을 쉬운 이야기로 바꾸어 전달하는 미덕도 가진다. 일본의 냉혹한 현실은 를 통해 두 아이의 비극으로 걸러졌고, 는 요정이 나타나는 숲의 우화를 들려 주면서 메마른 현대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런 미덕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 항상 관객에게 사랑받는 요인이 되었다.
국내에 들어온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대부분을 공동 소유하고 있는 일신창업투자회사의 김소영 팀장과 대원동화의 황정열 실장도 모두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 흥행에 가장 성공할 것"으로 내다 보았다. 이 중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는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다. 는 일본 내에서 1천 3백만 관객을 동원했으며 국외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저패니메이션의 다양한 경향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 개방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 이상의 개성과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실례이기도 하다.
국내 영화사들이 흥행 성공을 예상하는 작품으로는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돼 인기를 끈 , 의 오시이 마모루가 시나리오를 쓴 , 의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감독한 사무라이 활극 등이 있다.
이중인격을 가진 여자의 살인행각을 그린 는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드물게 스릴러를 표방한다. 는 캐릭터의 표정이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애니메이션도 탄탄한 심리극을 연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을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어투로 물어오는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동력을 알게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달리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갇히지 않으며, 결코 '어린이와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때로 지나치게 어렵다는 단점을 수반한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제외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 전망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미 많은 관객이 불법 비디오와 영화제 등의 경로를 통해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을 관람했다는 사실도 흥행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튜브 엔터테인먼트의 진희영 씨는 의 흥행 성공을 예로 들면서 "극장과 비디오는 다르다. 극장에서 보는 애니메이션은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므로 불법 비디오가 흥행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12월 초, TV 시리즈로 방영되었던 극장판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스타맥스의 조유철 씨는 "몇몇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겠지만, 한국 관객은 어릴 때부터 만화에 젖어 산 일본인과 다르다"면서 "일부 매니아들에게만 환영받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장기적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일 합작으로 제작된 가 흥행에 참패한 선례 역시 어두운 전조로 작용한다.
그렇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 개방이 국내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최근까지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은 거의 디즈니가 독점해 왔다.
등 야심적으로 기획된 한국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모두 흥행에 참패했고, 등 TV 애니메이션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등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일본 애니메이션은 음악과 캐릭터 중심인 디즈니의 서구적인 애니메이션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것이다. 일본문화 3차 개방에 반대 성명을 발표한 영화인회의가 특히 애니메이션을 지목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개방은 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을 고사시키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이라는 것. 일본 영화가 개방 1년 만에 시장 점유율 10%를 넘긴 것도 우려의 근거다.
현재로선 반대론자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아 개방의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스크린 쿼터 문제와 달리 여론도 유리하지만은 않다. 시장 보호의 실익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을 느긋하게 감상할 자유가 주어진 대신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는 이들과 시장 쟁탈전을 벌여야 하는 굴레를 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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