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의 소설집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문학동네)는 문학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고갈되어가던 문학이 다시 소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만한 문학적 결실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1)에서부터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에 이르기까지 박상우의 작품들은 오직 문학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독특하고도 소중한 심미적 경험을 고도로 압축된, 그리고 엄격하게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한 진한 감동과 전율을 경험하며, 그러한 미학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문학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
박상우의 문학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이다. 그곳은 환상 대신 환멸이, 유토피아 대신 디스토피아가 편재하는 절망과 좌절의 세상이다. 불모의 지역이자 사탄의 마을인 그곳에 내리는 밤비 역시 엘리엇이 기구했던 재생의 비가 아니라, 세기말의 암울한 산성비이자 죽음의 ‘블랙 레인’일 뿐이다. 사랑과 교류가 불가능한 곳―그곳에서 그의 주인공들은 낙태수술과 자살시도를 반복하며 실패한 사랑의 상처와 흔적을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 숙명적인 삶의 암흑 속에서도 박상우의 주인공들은 부단히 상처를 치유하고 실존적 사유를 시도할 자신만의 ‘공간’을 추구한다. 예컨대 ‘내 마음의 옥탑방’에서 주인공의 마음에 영원히 불 켜져 있는 옥탑방은 바로 그러한 공간을 상징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버린 텅 빈 공간―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인공의 상처 치유와 존재론적 고뇌는 시작된다. 부단히 하강하는 바위를 끊임없이 위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신화는, 이 작품에서 생존을 위해 날마다 백화점 매장이 있는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주인공과, 세속적 꿈의 실현을 위해 날마다 옥탑방에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그의 애인 주희의 슬픈 이야기를 통해 훌륭하게 재현되고 있다.
박상우의 문학세계에서 시지프스의 의지와 저항을 상실하고 오직 관성과 타성으로만 움직이는 지상은 곧 지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상의 주민이 되기 위해 옥탑방에서 아래로 내려간 주희는 스웨덴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지옥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탄 셈이 된다. 그 지옥에는 죽은 영혼들이 방황하는 록 카페와 지하무덤인 카타콤이 있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왜곡된 그곳에서 박상우는 ‘어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쓴다. 그런 맥락에서 90년대의 박상우는 60년대의 김승옥과도 같다. 사실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서울, 1964년 겨울’이 각기 다른 시대의 암울함을 얼마나 비슷한 감성으로 묘사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상우는 자칫 통속적인 실연 이야기일 수도 있는 ‘물 그림자를 위한 산문시’나 ‘붉은 달이 뜨는 풍경’이나 ‘내 혈관 속의 창백한 시’ 같은 것들까지도 한편의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빼어난 역량을 갖고 있는 작가다. 그의 문학적 역량의 상당부분은 작가 특유의 정신적 자유와 그로 인한 지적 성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박상우는 ‘나에게는 고향의식이라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곧 그가 아무 것에도 귀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문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 박상우의 그러한 태도는 12세기 사상가 성 빅터 유고의 유명한 말을 연상시켜준다. ‘자신의 고향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도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이미 성숙한 어른이다. 그러나 세상이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전한 인간이다’.
박상우에게 완벽한 고립과 철저한 고독은 곧 완전한 자유와 정신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비 역시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재생에 대한 저자의 염원과 기구의 은유인지도 모른다. 문학이 소중한 것도 바로 그러한 기다림과 바램 때문일 것이다.
김성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