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권농동. '비원 앞'으로 알려진 호젓한 동네.
삐뚤빼뚤한 보도블럭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니 80년대 서울의 풍경이 눈에 든다. 약속장소에 이르러 '이진천 팀장'을 찾아 머쓱히 문가에 들어서니 아, 이런. 방금본 80년대 풍경에서 탁 튀어나온 듯한 사람 하나가 100배는 더 머쓱하게 인사를 청한다.
건네받은 명함에 선명한 글자, 시민운동정보센터 컨텐츠팀장 이진천씨(31)다.
인터뷰를 위해 얼굴을 맞대고 앉았는데 이 사람,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다짜고짜 튀어나온 첫질문이 "인터뷰 안좋아하시나봐요?"였는데.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피식 웃는 말이 "이거 여간 난처한 게 아니네요"다. 싫어하고 뭐고도 없이 인터뷰는 처음이라니…
그러던 그가 "시민운동정보센터 소개 좀 해달라"하니,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윤기가 난다.
시민운동정보센터는 시민운동에 관한 소식을 제공하고 시민단체들의 정보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 이진천씨는 작년 5월 이곳에 합류, 7~8개월동안은 '한국민간단체총람' 만드는 일을 했다.
이제는 컨텐츠팀장이 된 그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시민운동정보센터의 홈페이지(www.kngo.net) 메뉴 전체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것. 그 외에 이틀에 한번씩 시민운동에 관한 기사 열서너개를 뽑아 회원들에게 e-magazine이라는 뉴스메일을 보낸다.
짚이는 바 있어 대학생활을 슬쩍 묻자 대뜸 "제가 학교를 좀 오래다녔죠" 한다. 한양대 영문과 89학번으로 9년만에 학교를 졸업했단 건 인터뷰 끝무렵에야 알게된 사실. 본인의 표현을 빌어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던 그는 '하수상한 시절'을 이기지 못해 기독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부끄러워 어쩔줄 몰라하며 털어놓은 그의 경력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전국회장.
'가을엔 진짜 재밌어질 것 같다'며 하는 말이 시민운동정보센터가 매 해 가을마다 시민단체 정보화포럼을 개최하는데, 올 가을엔 처음으로 청소년 홈페이지 경연대회도 연단다. 그는 현재 시민단체에 컴퓨터를 지원하는 사업도 맡고 있다.
"업체에서 저렴하게 구입해다 시민단체에 지원합니다. 중고 486도 아쉬운 단체들이 많거든요."
뜻없이 던진 '낙도분교에 컴퓨터보급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진다.
"사실 낙도분교 맞아요. 참여연대나 경실련처럼 크고 세련된 단체들도 있지만 지방의 소규모 풀뿌리 단체들도 얼마나 중요한데... 작은 단체들이 살아남아야 해요. 그래야 다양성을 얻을 수 있죠. 그게 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 아닌가요."
그 사이 친해졌는지 땀을 닦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말문이 트인 그는 청산유수다.
"한 3년~5년쯤 뒤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생각으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느슨한 커뮤니티를 하나 만들어볼까 해요. 살면서 참여하는 재미를 느끼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잖아요. 작은 모임들이 사회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개인은 그 안에서 자기 존재를 재확인하고..."
힘들 때는 없나 물었더니 "e-magazine 잘봤다는 이메일 한 통으로 그날 피로가 싹 풀린다"고 한다. 그는 정말 일이 재밌는걸까.
"네, 재미있어요. 역사적 사명감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건데, 그것만으로 일을 하는건 너무 갑갑하잖아요. 재미도 있어야죠. 지금은 이 일이 재미있어요"
그리곤 자기 성격은 요즘 말로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쪽에 약합니다' 그러면 된다며, 딱맞는 표현이 생겨 다행이라고 웃는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진 그는 자신이 나왔던 80년대 풍경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갔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그를 보니 생뚱맞게 청국장 생각이 난다. 너무 달아 금새 질려버리는 외제 초코렛이 아닌 바특하게 잘 끓인 청국장.
그는 21세기 첨단매체에 우리네 감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의 머리속엔 늘 새로운 생각들이 빼곡하다. 시민단체의 중매쟁이를 자처하는 그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오세린/동아닷컴기자 oh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