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구름이 걷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여름 들길이 거칠 것 없는 소년들의 웃음으로 금새 활기를 찾는다.
전날 "눈동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라"는 곽지균 감독의 요구에 고민하던 자효 역의 김래원과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떠나지 않던 수인 역의 김정현도 모처럼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웬만해서 OK 사인을 내리지 않는 곽지균 감독은 세 번만에 만족한 표정으로 촬영을 마쳤다.
전날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전날, 곽지균은 친구 수인이 사랑했던 여교사 정혜(진희경)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자효의 모습을 지루하게 거듭 찍었다. 곽지균의 표현대로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탁탁 치고 올라오는 감정의 흐름을 눈에 담고 절망에서 벗어나 말갛게 개인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김래원은 스탭들이 바로 옆 양봉장에서 사온 꿀단지를 돌리고 있는 동안에 현기증 날 정도로 뜨거운 백암산 길에 한 시간 가까이 서 있었다.
▽시간 속에 고정된 정물화 만들기
곽지균 감독은 운명에 먹혀 버린 젊은이들의 사랑을 그린 데뷔작 와 '청춘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소재들을 다룬' 을 찍은 바로 그 감독이다. 한때 멜로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었던 곽지균이 2년 반만에 찍는 신작 은 터질 듯한 젊은이들의 생기발랄한 웃음보다 영혼 깊은 곳의 어두운 청춘의 감정을 끌어내려 한다.
어쨌거나 젊은 청춘의 얘기를 담아도 곽지균에게는 이제는 동시대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과거 어두웠던 시대의 감성이 늘 따라다닌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감성에 맞추려 노력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섬세하고 정적인 그의 스타일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스릴러 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을 찍으며 다시 본래의 장기인 멜로 영화로 돌아온 그는 이제 스무 살을 막 벗어나려 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택했다.
은 자신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해 첫 경험의 상대였던 하라(윤지혜)가 자살한 후 섹스에 탐닉하는 자효의 이야기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정혜를 사랑하던 끝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수인의 이야기를 병렬로 펼친다.
이 두 쌍의 남녀 이야기를 찍는 곽지균은 젊은이들의 생생한 일상이 아니라 시간 속에 고정된 정물화 풍의 이미지 만들기에 치중하고 있다. 수인을 화장하는 화장터 장면. 바깥에서 모기에 시달리는 스탭들이 모기장을 온 몸에 휘감고 깡통에 모기약을 담아 태우면서 한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 곽지균은 우연히 발견한 이미지에 흥분했다. 소각로의 금속판에 조명을 비추자 황혼 같은 빛 그림자가 생긴 것이다.
곽지균은 "영화 도입부에 쓸 매화 꽃잎 날리는 장면이 청춘의 희망을 상징한다면 소각로의 이 불빛은 죽음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이미지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청춘의 이미지를 한번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각로의 온도를 잘못 계산해 촬영 전에 준비한 관을 태우는 작은 사고가 났지만 곽지균은 생각지도 못한 이미지를 잡아내 마냥 흡족한 표정이다.
▽"예쁜 그림의 영화가 나올 것이다"
곽지균 영화는 수작과 태작을 오락가락했으면서도 화면은 늘 아름답다. 도 그럴 것이다. 스탭들도 모두 "정말 예쁜 영화가 나올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화 꽃잎이 흩어지는 도입부는 예산 부족으로 CG를 쓰지 못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더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꽃 소금과 솜을 이용해 6월에 찍은 눈밭은 스크립터 김태연 씨의 말대로라면 "환상이다". 정혜가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수인을 회상하는 장면을 찍을 때 곽지균은 손끝 하나가 품는 감정까지 스크린에 담기 위해 몇 번씩 리허설을 되풀이했다. 실험적인 단편영화 을 촬영했으며 으로 상업영화를 처음 시작한 촬영감독 함순호는 "이렇게 예쁜 화면이 내 취향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정혜를 연기하는 진희경의 회한 어린 표정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영화가 예쁜 그림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혼자 살고 있다. 내게는 흔히 말하는 '생활'의 개념이 없다. 일상을 사는 어른들 이야기는 자신 없다"고 고백하는 곽지균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청춘'의 이야기에도 생활을 녹여 내지 못한다. 곽지균이 직접 쓴 시나리오에는 "바람에 떨어지는 매화꽃, 초저녁 보름달, 노랗게 익어 가는 보리밭.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들이야"같은, 낭만적이지만 어찌 보면 문어체의 생경한 대사들로 가득하다. "이런 콘티 본 적 있어요?"라고 미술감독 구진오가 느닷없이 꺼내 든 콘티 뭉치도 마찬가지다. '차마 울 수도 없는' 자효, '햇살 속으로 멀어져 가는' 정혜, 그림으로 설명하는 다른 콘티와 달리 곽지균은 콘티에 감상적인 어휘들을 또박또박 채워 놓았다.
"그림은 이미 감독의 머리 속에 다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 위해 미술감독은 콘티를 꺼내든 것이었지만, 그 콘티는 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무엇인지도 보여 주었다. 곽지균은 정혜의 방과 수인의 자취방이 정갈한 분위기가 배어 나오는 개량 한옥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곽지균의 시간은 마치 2, 30년 전쯤 어느 지점에서 정지해 버린 것 같다. 그에게 '청춘'이란 피와 살로 살아 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다.
▽우려와 기대가 반쯤 섞인 영화
제작사 원 필름의 유현근 기획이사가 "복고적인 분위기는 의 장점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단정하지만 억제된 자기 영화의 분위기를 아는 듯이 곽지균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과감한 정사 장면을 시도했다.
공포영화 에 이어 두 번째 영화를 찍는 김래원은 비닐하우스에서 하라와의 정사 장면을 촬영할 때 근심에 시달렸다. "밥도 못 먹을 정도였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편안해졌다"고 하지만 "경주에서 찍을 배두나와의 정사 장면은 여전히 걱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물론 누구보다 가장 독한 후유증에 시달린 이는 곽지균 감독이라고 현장 스탭들이 조용히 전해준다. 현장에서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능숙하게 촬영을 진행하는 이 중견 감독은 이제껏 이런 장면을 찍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곽지균 특유의 '품위 있는' 정사 장면이 나올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전체적으로 찍기보다 손과 다리만 찍는 방법을 택해 연기 지도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무심한 척 한다.
은 우려와 기대가 반쯤 섞인 영화다. 배우들에게 곽지균의 탐미적 취향은 매혹이다. "감독과 촬영 감독이 나를 최대한 예쁘게 찍으려 노력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복되는 촬영도 참을 수 있다"고 진희경은 말한다.
그것은 또한 독이기도 하다. 시대의 호흡과 함께 가지 않는 영상미라면 보편적인 삶의 공기가 탈색된 맥빠진 영화가 나올 수도 있다.
과 으로 연속 실패를 경험한 곽지균 감독은 만만치 않은 부담을 안고 출발했지만 "영화를 찍지 않을 때는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산다"는 그의 모습에서는 연륜이 주는 여유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여유가 영화 에 넉넉한 포용의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정읍 촬영을 거의 마친 스탭들은 곧 경주로 장소를 옮겨 8월 중순까지 촬영을 끝낼 계획이다. 개봉은 10월 중순으로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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