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안보인다. 그저 본능적으로 달린다. 함께 달리는 다른 선수의 숨소리와 땀냄새, 그리고 스치는 바람만을 온몸으로 느낄 뿐이다.
세계 최강 미국 여자육상 대표선수가 된 말러 러년(31). 그녀는 망막퇴행성 질환으로 아홉살 때부터 눈앞이 희미해지기 시작해 열네살 때 ‘법적 장님’이 된 시각장애인이다.
그녀가 한계상황의 장애를 딛고 올림픽보다 더 어렵다는 미국의 시드니올림픽 육상대표선수로 우뚝 서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17일 열린 시드니올림픽 미국육상대표선발전 1500m. 러년은 4분06초44로 세계육상계에서 내로라 하는 레지나 자콥스, 수지 페이버 해밀턴의 뒤를 이어 3위로 골인하며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표로 선발돼 당당히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냈다.
그러나 이 결과는 그녀에게 어쩌면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달리기는 바로 시력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는 끊임없이 엄습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기장 트랙의 레인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특수 콘택트렌즈를 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투혼으로 러년은 92년 바르셀로나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서 100m, 200m, 400m, 멀리뛰기 4개 종목을 휩쓸었다.
자신감을 얻은 러년은 96 애틀랜타올림픽 7종경기 미국 대표선발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탈락.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다시 96 애틀랜타 패럴림픽 5종경기에서 우승한 러년은 중장거리로 종목을 바꿔 4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시드니올림픽 정식경기 티켓을 따내는 의지를 과시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처음으로 올림픽 육상에 나서게 된 그녀. 그러나 그녀는 결코 우쭐해하지 않았다. “나를 최초의 시각장애인 올림픽 출전자로 보지 말고 단지 다른 선수와 똑같이 올림픽 출전 선수로 봐 달라.” 그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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