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님이시여, 내 아들로 하여금 그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싸우다 패배했을 때에는 도리어 자랑스러움과 구부러지지 않는 심성을 지니게 하옵소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간구했던 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패배에는 정직한 패배와 부정직한 패배가 있다. 그러기에 자랑스럽고 떳떳한 패배가 있고,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패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패배는 언제나 수치스럽고 굴욕적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어떻게 하든지 패배만은 면해 보려고 사력을 다한다. 전쟁과 스포츠, 정치와 사업,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다.
‘윈―윈’정책이 양 당사자를 모두 행복하게 해주는 것처럼 서로 한발씩 물러나 져주는 ‘패―패’정책도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윈―윈 정책은 그 주안점과 덕목이 승리에 있기 때문에 패―패 정책에 비해서 과열과 탈선으로 인한 실패의 위험성이 높다.
우리 문화에서는 패배란 오직 처참하고 비굴한 것일 뿐이다. 우리 국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했고 패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역사를 이어왔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에서 흔히 보는 결사 반대와 극한 투쟁은 그런 문화 유산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그것이 가져온 역사속의 비극들을 성찰하면서 이제는 우리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지는 법을 배울 때가 됐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회적 갈등에서 우리는 심한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의약분업 갈등에서 불거진 정부와 의약계의 극한 대결이 정부와 시민의 무력감을 절감케 했다. 금융노조, 호텔노조, 사회보험노조 등 각종 이익 집단의 집단이기주의가 한때는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위협적인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윤리도 원칙도 없는 파업이 진행됐고 모 공단 이사장과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폭언 폭행과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고 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정부는 무엇 하는 기관인가, 공권력은 왜 존재하는가 등의 물음에 이제는 위정자가 마땅히 답해야 한다. 집단이기주의가 공공의 이익과 정부의 권능을 압도한다면 선의의 제삼자와 힘없는 무조직 시민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렇게 해서 민족공동체가 바닥에서부터 흔들려 안전과 발전에 위해를 입는다면 그 피해는 그들 이익집단들에도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심각한 체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판은 어떠한가. 오죽했으면 집권당 대표가 ‘개판’이라고 한탄했겠는가. 개판이란 무엇인가. 개판에는 이성적인 대화와 타협이 없고 오직 집단적 폭력과 폭언의 대결이 구조화돼 있을 뿐이다. 개판에는 도덕성이 없다. 예의도 염치도 없고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물고 뜯는 사투가 있을 뿐이다. 개판에서는 진정코 우군이 누구이며 적이 누구인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알 수 없고 누가 누구를 언제 물어뜯을지 예측할 수 없다. 개판에는 삶과 죽음의 긴박함이 있다. 극한 대결과 무자비함에 의존하는 생존 전략이 있을 뿐이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강박관념이 지배한다. 개판에는 멋있고 명예로운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처절한 죽음과 비굴한 패배가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아직도 지면 곧 죽는 것으로 믿는 문화 현상을 심화시키는 한 우리 사회의 ‘개판’은 정치권 안팎에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존속될 것이다.
국회는 여야의 전쟁터가 아니다. 국회는 마땅히 법체계와 질서를 옹호하고 정부와 함께 공권력의 엄정성, 객관성,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의회민주주의에서 필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개인별 또는 정당별 연구와 의논이지 여야간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어김없는 개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국가 생활 전 분야에 걸쳐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무엇을 빼앗아 이길 것인가에 골똘하지 말고 무엇을 내주어 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정직하게 지고는 도리어 자부심과 불굴의 정신을 견지하는 그런 신선한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특히 정치권에 있어서는 아무리 집권 여당 또는 원내 제1당이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멋있고 정직하게 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양심이며 애국이다. 그래야만 내일 그들은 영광의 승리를 보상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윤형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