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작가 이창래
재미교포작가 이창래의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백인 미국사회에서 동양인 이민자가 느끼는 뼈저린 고독과 완벽한 고립, 그리고 아웃사이더의 강렬한 소외의식과 영원한 망명의식이다. 미국문단의 찬사와 주목을 받았던 처녀작 ‘네이티브 스피커’에서 그는 한국과 미국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상실감에 방황하는 재미교포들의 문제를 이민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갈등을 통해 설득력 있게 표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제스처 라이프’(중앙 M&B)에 오면 작가 이창래의 궁극적인 관심은 미국 내 소수민족 문제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보편적인 인간의 존재론적 고뇌로 확대된다. ‘제스처 라이프’의 주인공이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사실 역시 이 작품에 보편성을 더해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복합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 프랭클린 하타는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일본인이 되었으며, 지금은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그 어느 하나에도 충실하지 못했으며, 평생을 제스처 인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늙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하타의 비극은 그가 평생을 주위로부터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며 살아왔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위에서 기대하는 삶만을 살아왔으며, 공적이고 전체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까봐 늘 조바심을 해왔다.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었을 때도, 일본 제국의 장교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미국 시민이 되었을 때도 그는 언제나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제국 군대에서도, 그리고 미국사회에서도 늘 주류문화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모범적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한다.
예컨대 베들리 런에 정착할 때에도 하타는 좋은 저택을 사서 끊임없이 정원을 가꾸고 이웃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의 삶은 진짜가 아닌, 오직 주위와 집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 라이프’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타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의사를 지칭하는 ‘닥’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하타는 단지 속성교육을 받은 일본 군대의 의무장교였고 마을 의료기기 판매원이었을 뿐, 의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생동안 서투른 의사 흉내만 냈고, 그로 인해 주위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왔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은 제스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한국 여자아이 서니를 입양한 것도 어쩌면 그런 제스처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제스처 라이프’에는 두 개의 세계가 긴밀하게 병치된다. 예컨대 현재의 미국과 과거(태평양전쟁 당시)의 버마, 부촌인 베들리 런과 빈촌인 에빙턴, 또 정신대 소녀 ‘끝애’와 양녀 서니, 그리고 가해자인 일본군과 피해자인 정신대가 바로 그것이다. 하타는 ‘끝애’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역시 제스처로 끝나고 만다. 그는 그녀가 동료 일본군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상황에서도 속수무책인 방관자로 남으며,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백인여자 메리 번즈와의 로맨스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제스처 라이프’는 정신대 문제를 고도의 문학적 기법으로 다루고 있는 격조 높은 소설이다. 정신대 소녀의 직접적인 고발보다는 가해자이자 방관자의 회상을 서술기법으로 선택함으로써 작가는 정신대 문제의 예술적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그래서 이창래의 소설에서는 아이작 싱거의 과거에 대한 ‘고통’과, 랠프 앨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가면 쓴 삶이, 그리고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스처 인생’이 세계문학 속에서 보편성을 성취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