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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김형석/"형님, 우린 모두 죄인이에요"

입력 | 2000-07-23 19:03:00


나이 든 실향민의 대부분은 탈북자이다. 나 자신도 탈북해서 실향민으로 살고 있다.

47년에 고향을 떠날 때는 한 지붕 밑에 사는 가족 이외에는 누구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내가 떠난 지 20여일 후에 삼촌이 부친에게 '요사이 형석이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물었다. 부친은 '어디 좀 갔어'라고 말했다. 두 형제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앞길이 무사하기를 빌었을 뿐이다.

중공군이 남침해 왔을 때 나는 고향에 들렀다가 모친과 세 동생을 이끌고 남하했다. 부친은 삼촌과 같이 길을 잘못 들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두분 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믿고 있다.

다섯 식구가 모두 부친이 찾아와 작별을 나누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나와 형제들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되고 말았다.

모친은 부친과 두 딸이 있는 북녘 고향을 잊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어머니 100세까지만 사시지요. 그 때 쯤이면 고향에 가 가족을 만나게 되겠지요'라고 위로하곤 했다. 오래 사셔서 101세에 돌아가실 때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계셨다. 개성 송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잠드셨다.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 곳으로 가시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나만 죄인이 된 것은 아니다.

내 친구는 일곱살 된 딸과 그보다 더 어린 아들을 두고 왔다. 딸 생각만 하면 자기는 죄지은 아버지라고 괴로워했다.

내 큰 딸애가 자라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였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는 '나는 죄가 많은가봐. 우리 딸애도 같은 나이였는데…'라면서 서러워했다. 내 친구는 두고 온 두 아이들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 집안 동생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족을 보기 위해 북에 갔었다. 먼저 보통강호텔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시골집으로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네 작은 동생은 빨갱이가 다 되고 말았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귀담아 듣지 말아라'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 위의 동생은 정치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면회를 끝내고 순안비행장에 왔을 때였다. 큰 동생은 계속 울기만 하다가 형의 가슴에 안기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해 보았다. 왜 저렇게 우는 것일까. 형은 그 울음소리에서 생생한 음성을 들은 것이다. '형님 그 때 날 데리고 떠나시지. 지금 내 인생은 무엇입니까. 작은 동생은 빨갱이가 되고…'라는 소리를….

미국에 돌아온 내 동생도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형님 저희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지금도 통곡하던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죄 값을 언제 어디서 치르겠어요'라고.

탈북한 실향민이 아닌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할 것이다. 그런 죄의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탈북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기자들이 '어떻게 가족을 두고 떠날 수 있었느냐'고 묻는 것을 보면 더욱 담담해지곤 한다. 피 흘리는 아픈 상처에 재를 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과거에 한 차례 있었고 이번부터는 규모가 큰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운 재회는 이루어지겠지만 쌓이고 쌓인 죄의식까지 씻어질지는 모르겠다.

나 자신도 고향에 가서 부친의 산소 앞에 섰을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죄인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빌고 싶을 뿐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특권층 인사들이 남보다 먼저 평양에 가고 싶어 청탁을 하고 압력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정치권만이 아니다. 종교계 지도자들도 그랬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본다. 오히려 지도층 인사들이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거나 양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죄의식을 모르는 잘못된 사람들이다.

j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