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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두文化 4]시드니 영화배우 되다

입력 | 2000-07-23 19:26:00


◇이학박사 윤송이 VS 철학박사 김형찬

김형찬〓디지털 강아지 시드니가 살아가는 데 필요 한 것들을 다 배우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계속 교육만 하면 시드니도 싫증을 느낄 것 같은데….

윤송이〓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여러 해 동안 교육이 필요하지만 강아지의 경우는 걷 고 뛰고 먹을 줄만 알면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조 금씩 배우면 되지요.

김〓그러면 시드니가 배우면서 살아가도록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가 중요하겠군요.

윤〓복잡하게 환경을 새로 만들 것이 아니라 일정 한 환경이 마련된 영화 속에 시드니를 넣어 보면 어떨까요? 시드니가 영화배우가 되는 거예요.

김〓영화배우요? 서툰 배우가 끼어 들어 영화를 망 칠까 걱정이군요.

윤〓시드니를 너무 무시하시네요. 시드니도 할 수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영화는 정해진 대본에 따 라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캐릭터들 이 상호작용(interaction)을 하면서 줄거리를 만 들어 가는 거예요.

김〓독자나 관객이 스토리를 선택하도록 하는 소설 이나 인터넷 영화, 게임 등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예컨대 ‘삼국지’에서 주요 전쟁의 고 비마다 누가 승리하도록 선택하는가에 따라 이야 기의 전개가 달라지도록 하는 방식이죠.

윤〓그런 것은 작가가 몇 가지 줄거리를 만들어 놓 고 독자가 그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지만 제가 말 하는 영화는 캐릭터들끼리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사람도 캐릭터로 참여해서 다른 캐릭터 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스토리 만들기에 한 몫 을 할 수 있지요.

김〓사람들이 영화나 소설을 보는 이유가 다양한 삶을 간접 경험해 보거나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캐릭터로 참여할 경우에 그 효과는 대단하겠군요. 하지만 캐릭터간의 상 호작용으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면 전혀 엉뚱하 게 전개될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삼국지의 영웅 들이 뒤바뀌는 정도야 다양한 스토리의 전개로 볼 수 있겠지만 적벽대전을 계기로 말이나 강물 의 캐릭터가 영웅들을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든가 하면 개연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요.

윤〓물론 ‘개연성’이 없으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 겠죠. 캐릭터가 캐릭터로서 기능하려면 감정 생 각 행동 등에 ‘일관성(consistence)’이 있어야 해요. 일관성 있는 캐릭터들이 상호작용할 때 당 연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요. 이 사 회도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지고 굴 러가잖아요. 각 성격이 일관성을 가지는 한 엉뚱 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거예요.

김〓실제로 모든 사회적 현상은 참여 주체간의 상 호작용으로 이뤄지지요. 특히 불교의 관점에서 사회적 행위나 현상뿐 아니라 참여 ‘주체’마저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변 화하는 일종의 사상(事象·event)이예요. 그럼에 도 각 주체가 주체로서 존재하려면 고정된 성격 은 아닐지라도 정체성을 유지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윤박사의 말에 동의해요. 하지 만 현실에서는 인간이나 동물 등의 돌발행동이나 일탈행위로 예기치 못한 사태에 빠지는 일이 많 이 있지요. 캐릭터의 상호작용에 스토리 전개를 맡겨 둘 경우 캐릭터로 참여한 인간이 위험에 빠 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예요.

윤〓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지만 일단은 영 화 안에서 캐릭터들끼리만 상호작용을 하도록 해 보죠.

김〓그러면 애니메이션 영화 ‘타잔’ 속에 시드니를 등장시켜 보면 어떨까요?

윤〓타잔이 제인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볼까요? 원래 영화 ‘타잔’에서는 타잔이 치타와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우연히 제인을 만나죠. 이 때 시드니가 있었다면 타잔과 치타가 시드니에게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주느라 진땀을 빼다가 제 인을 못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제인으 로부터 문명세계에 대해 배울 기회를 못 가진 타 잔은 기존 이야기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겠죠.

김〓어떤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자신 도 변하고 상대도 변하고 서로가 만들어가는 사 건도 변할 수 있겠지요. 잘 활용한다면 ‘주체’와 ‘관계’ 중 어느 쪽에 중심을 두고 사회 현상을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실감나게 검증하는 시 뮬레이션이 되겠군요. 디지털 생명과 아날로그 생명이 함께 살아갈 때 생기는 문제점들을 미리 검토할 수도 있겠고요.

윤〓제가 지금 만들고 있는 ‘햄릿’에 시드니를 넣 어 보면 어떨까요. 햄릿에게 어린 시절부터 디지 털 강아지 친구가 있었다면 함께 뛰어 놀고 사냥 도 하면서 셰익스피어가 만든 햄릿보다 문화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성격의 햄릿이 될 수 있었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이 홀로그램으 로 구현돼 인간이 직접 이 이야기 속에 들어가 캐릭터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스토리를 만들어 간 다면 단순히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을 받고 실질적인 간접경험이 될 거 예요.

김〓영화에서도 배우와 관객, 정보제공자와 수용자 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더 큰 효과를 만들어 내는 군요. 어쨌든 시드니의 성공적인 영화배우 데뷔 를 축하해야겠네요. 윤박사와 저도 곧 데뷔하겠 지만….

hphong@donga.com

◇용어해설

■사상(事象·event)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감각기관으로 관찰되는 현상. 불교에서는 사건뿐 아니라 사물조차도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현상으로 본다.

■‘주체’와 ‘관계’

데카르트처럼 ‘주체’를 인식과 도덕의 근원으로 볼 때 ‘주체’는 사물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유를 제시할 수 있고, 자유와 함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은 오히려 주체가 사회적 ‘관계’를 비롯해 무의식, 힘에의 의지 등과 같은 주체 외적 요소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홀로그램(hologram)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holography·레이저 사진술)로 입체상을 촬영 재현하는 방법. 간단한 홀로그램은 신용카드, 비디오 테이프, CD케이스 등에서도 로고를 표시하거나 불법 복제를 방지하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SF영화에서는 홀로그램을시각적 눈속임 기술로 사용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