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20대 때 저우룬파(周潤發)나 성룽(成龍)의 영화 한 편 안보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홍콩누아르의 비장함을 온 몸으로 뿜어내던 저우룬파,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액션의 대가 성룽.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들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스타가 됐다.
79년 할리우드로 간 성룽(영어명 잭키 찬). ‘D급 배우’로 불리는 수모에 굴하지 않고 조역,단역을 전전한 끝에 98년 ‘러시아워’가 히트하면서 비로소 인정받았다. 최근 그가 직접 제작한 ‘샹하이 눈’을 서부영화로 만들고 주인공을 맡은 건 의미심장하다. 미국 전통 장르인 서부영화 이미지를 ‘미국 안’에서 무너뜨렸기 때문.
반면 95년 할리우드에 진출한 저우룬파는 성룽처럼 영어 이름도, 히트작도 없는데 허무한 듯하면서 따뜻한 이미지가 어필해 스타가 됐다. 그의 최근작 ‘와호장룡’은 ‘샹하이 눈’과 정반대로 미국 메이저 영화사가 중국 전통의 무협영화까지 접수해버린 동양적 할리우드영화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검객이 되어 잊혀진 강호의 정신을 되살린다.
▼샹하이 눈▼
서부영화 ‘하이 눈’을 본따 제목을 붙인 ‘샹하이 눈(Shanghai Noon)’에서 성룽이 맡은 배역의 이름도 서부영화 스타 존 웨인을 본딴 장 웨인. 19세기말, 악당들에게 납치된 중국 공주를 구하러 미국 네바다 주에 온 황실 근위대원 장 웨인의 좌충우돌 모험담을 그린 코믹 액션 영화다.
이 영화는 중국 자금성에서부터 미국 인디언 부락, 서부 황야까지 가파르게 질주하지만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길게 땋은 머리에 중국 관복 차림으로 처음에 황야의 총잡이들, 인디언들과 잇따라 싸우던 성룽은 나중엔 카우보이 복장에 말을 타고 총잡이 로이(오웬 윌슨)와 짝이 되어 종횡무진 맹활약을 펼친다. 선량한 표정과 잽싼 몸놀림이 결합된 성룽의 코믹 액션, 동서양의 관습 차이에서 발생하는 유머, 철없는 총잡이 로이의 수다를 가벼운 기분으로 즐기면 되는 영화다.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에 성룽이 겪는 모험담들이 단조롭고 결말이 싱겁지만 동양 액션스타가 카우보이가 되어 서부를 누비는 걸 보는 건 확실히 신기한 경험이다.
성룽의 열성 팬이라면 동작이 전보다 굼뜨고 늙은 테가 나는 그의 액션에 마음 아플지도 모를 일. ‘성룽 영화’답게 끝의 NG모음이 재미있다. 감독 톰 다이. 8월5일 개봉.
▼와호장룡▼
미국 컬럼비아영화사가 제작했으나 중국에서 촬영하고 저우룬파와 양쯔충(楊紫瓊), 장쯔이(章子怡)등 중국배우들이 출연한 대작 무협영화다. 연출도 대만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리안(李安)감독이 맡았다.
제목(臥虎藏龍)은 ‘누운 호랑이와 숨은 용’이라는 뜻. 그처럼 숙명의 덫에 걸려 마음속 열정을 누르고 살아야 했던 무사들의 비련을 그렸다. 19세기말, 강호의 이름난 검객 리무바이(저우룬파)는 덧없음을 느끼고 강호를 떠나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수련(양쯔충)에게 맡긴 보검이 도난을 당하는 통에 뜻대로 떠나지 못한다. 보검을 훔친 자는 강호를 동경하는 귀족의 딸 용(장쯔이). 리무바이는 무공이 뛰어난 용을 무당파 수제자로 키우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우여곡절 끝에 용은 혼자 칼을 차고 강호를 떠돌기 시작하는데….
공중을 날고 벽을 수직으로 타고 오르내리는 환상적인 와이어 액션 기법, 합이 정확하고 발레같은 액션동작은 ‘매트릭스’ 무술감독이었던 위엔허핑(袁和平)의 솜씨. 그러나 리안 감독은 중국 무협이 지닌 동(動)의 미학에 정(靜)적 분위기를 결합해 독특한 액션영화를 빚어냈다. 적막한 슬픔이 밴 정적 분위기의 중심에는 리무바이 역을 맡은 저우룬파가 있다. 절제와 단련으로 내공을 키워온 리무바이가 휘청거리는 대나무 위에서 용과 대결하는 장면은 “진정으로 강한 건 부드러움”이라는 이 영화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8월19일 개봉.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