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집시의 시간' 중
창설 30주년을 맞은 국제집시연맹(IRU)은 7월27일 체코 프라하에서 전세계의 집시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모임을 갖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대량학살로 희생된 약 50만명의 집시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국가’를 정식 선포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의 국가는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처럼 영토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기존의 국제조직과 체제를 국가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대폭 강화한 형태를 의미한다.
약 1000년 전 인도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해 전세계 곳곳에 현재 200만∼300만명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시들은 지금까지 국가 없는 유랑민족으로 살아 왔다. 최근 들어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의 수는 감소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국가 창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 물결속 국경의미 약화▼
현실 세계에서는 오히려 전지구화와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국경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국가의 역할이 급격히 축소되고 나아가 국가 소멸의 전망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새로운 개념의 국가를 창설하려 한다. 전지구화는 국경과 영토의 의미를 약화시켰고 정보화는 시공간의 거리를 축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시랜드(Sealand)’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의 인터넷 웹 사이트를 만든 뒤 가짜 여권과 학위 운전면허증 등을 만들어 거액을 받고 팔아 온 국제 사기꾼들이 스페인에서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6000달러가 넘는 신분증을 사려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줄을 이었고, 60여명은 가짜 외교관 여권을 사들여 미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외교관 행세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들은 사기꾼이었지만 도리어 영토 없는 국가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 준 셈이었다. 물질 개념마저도 변하고 있는 상황이니 국가의 기본요건 중 하나였던 영토의 의미도 다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되는 모든 정보는 디지털로 코드화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물질에 대해 인식하는 정보도 디지털 코드화한 뒤 그 코드를 다른 지역으로 전송해 다시 물질적 감각정보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상공간 이용 새 공동체 가능성▼
칸트가 말한 ‘물자체(物自體)’처럼 인간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현상 이면의 ‘원인’은 여전히 감각영역 밖에 미루어 둔 채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되는 현상의 정보를 디지털 코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재’의 영역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디지털 코드만으로 조작된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구현한 가상세계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미 남들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영토국가를 세운 후 주변 국가와 심각한 갈등이 빚어 왔음을 상기한다면, 무리하게 영토의 욕심을 내지 않는 집시들의 경우 가상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사방에 흩어져 사는 그들을 한 곳에 모으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통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 지식 자본의 이동이 가능한 오늘날 무리해서 한 곳에 모이지 않고도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을 만한 조직을 꾸릴 수 있다. 기술이 더 발달하면 화상 통신의 수준을 넘어 디지털 코드화된 자신의 몸을 가상공간 혹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아날로그 공간으로 보낼 수도 있게 된다.
정착민의 사회체제와 다른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 온 집시들이 ‘유목민(nomad)의 시대’라는 이 시대에 새로운 국가 모델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혈연 언어 지역 경제 문화 등의 공유를 근거로 한 근대민족국가의 개념을 넘어 서로의 이해와 관심에 따른 문화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창설도 멀지 않은 듯하다. 그것이 어떤 형식과 조직을 가진 ‘국가’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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