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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京平축구 출전 남측 유일생존자 김화집옹

입력 | 2000-07-31 19:10:00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상봉 등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남북한 화해무드를 지켜보는 원로축구인 김화집(金和集 대한축구협회 고문·91)옹의 감회는 남다르다. 김옹은 서울(당시 경성)과 평양이 축구교류를 통해 두 도시간 친목을 다졌던 경평축구대회 주역중 유일한 남측 생존자. 1930년 열린 2회 대회와 1933년의 3회 대회 때 선수로 나섰고 4회 대회 때는 심판으로 참가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옹은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공을 찬 것은 3·1만세운동이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것과 비슷했다”며 “경성과 평양의 내로라 하는 축구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고 한민족은 자긍심을 느끼며 단결했고 억눌린 감정도 다소나마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평양 순안공항 상봉을 눈물을 흘리며 지켜봤다는 김옹은 그 순간 ‘경평 축구의 부활’을 떠올렸다고 한다.

“강기순(康基淳) 한영택(韓泳澤) 장병오(張炳五) 등은 살아나 있는지…” “강기순 한영택과는 2회 때 몸을 심하게 부딪치며 함께 뛰었지. 장병오는 내가 심판으로 참가한 4회 때 만났는데 모두 어린 시절 공을 같이 찬 친구들이었어.” 김옹은 감회가 새로운지 잠시 고개를 들며 회상에 잠겼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옹은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축구실력이 뛰어나 경성의 배재중으로 스카우트됐고 보성전문(현 고려대)에 입학하면서 ‘경성대표’가 됐다. 사실 김옹은 평양대표로 뛰어야 했으나 경성측이 출전자격을 출신지로 한정하면 당시 ‘축구의 메카’인 평양에 뒤지기 때문에 현주소에 따라 선수를 선발하자고 주장해 결정했다는 것. 당시엔 전문학교가 경성에 몰려 있어 평양에서 유학온 선수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경성은 총 16차례의 대결에서 4승7무5패로 가까스로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고.

“남북정상도 만나고 이산가족도 상봉하는데 축구대회 하나 못 열겠나?”

김옹은 경평축구의 부활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젠 서울―평양축구대회를 열어 서로가 일체감을 느낀 뒤 2002년 월드컵때 단일팀을 만들어 한민족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치는 거야.” 김옹은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2002년 단일팀으로 세계무대를 휘젓는 ‘코리아팀’을 그려보았다.

김옹은 아흔을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축구가 날 오래 살게 만들었지. 북에도 나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김옹은 경평축구때 만났던 친구들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