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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충식/고향을 어찌 잊으리

입력 | 2000-08-02 18:40:00


‘제3의 존재.’ 핏줄이 다르기 때문에 결코 일본인이랄 수 없다. 귀화한다고 해서 당장 차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핏줄을 찾아 고향에서 살기도 어렵다. 삶의 터전이 일본에 있고 일본어가 더 빠르며 거기 문화 풍습에 더 익숙하다. 일본도 한국도 내 고향 같지 않은, 영원히 제3의 공간을 떠도는 실향민…. 재일 한국인들이 느끼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요 서글픔이다. 작가 유미리도 이런 재일동포적 ‘존재론’을 한숨처럼 토로한 적이 있다.

▷1945년8월 광복 무렵 재일동포는 무려 210만명이었다. 1909년 겨우 790명에 불과하던 동포수가 그렇게 늘어난 것이다. 1910년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농민들이 제1차세계대전의 군수품 경기를 탄 일본의 노동력 수요를 찾아 흘러갔다. 20년 통계에 3만175명이 잡혀 있다. 20, 30년대에도 일본에서 주로 직공 갱부 토공 일을 하기 위해 경남북 전남 지역의 농촌출신이 대거 건너갔다. 그렇게 해서 38년경 80만명.

▷37년의 중일전쟁, 43년의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제발로 일자리를 찾아 공업화된 일본을 찾아간 인구보다 강제로 끌려간 인력이 더 많아졌다. 병력 노동력 징발로만 100만명이 넘게 끌려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할 때 동포는 210만명 정도. 그중 150만명 가까이 귀향했지만 나머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실향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고국의 분단과 정치적 혼란 및 경제적 피폐, 거기에 귀국시 가지고 갈 수 있는 화물과 지참금의 제한이었다.

▷47년말 동포 수는 59만8507명. 당시 일본에 있는 외국인 총수의 93%에 달하는 이들이 오늘날 재일동포 사회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회도 고국의 분단에 따라 쪼개졌다. 한국계(민단)와 북한계(조총련)로 나뉘어 극렬하게 대립했다. 그래서 조총련계 동포들이 한국 땅을 성묘차 밟은 것도 광복 30년이 지난 75년에야 가능했다. 남북 장관급 회담의 합의로 다시 8·15를 전후해 조총련 동포들의 한국방문이 이루어진다. 화해 무드는 ‘일본의 이산가족 동포’에게도 뿌듯함을 안겨주고 있다. ‘고향을 어찌 잊으리.’

seesche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