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의 격투기 중계가 기다려진 적이 있었다. 70년대였다. 경기는 싱겁게 끝난 것으로 기억된다. 승부를 결정짓는 규칙이 있었을 터이지만 애초부터 잘 될 경기가 아니었다. 복서가 링에 눕거나 잡을 수는 없고, 레슬러가 펀치로 맞설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굳이 복싱과 레슬링의 만남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씨름단이 오키나와나 몽고에 가서 친선경기를 해도 그 지역의 씨름 방식으로 하면 승부는 뻔하다.
그래도 복싱 레슬링 유도 태권도 고수가 맞서면 어느 쪽이 이길까 라는 궁금증은 있게 마련이다. 사실 그런 경기는 격투기 등으로 포장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 비공식적으로 이뤄지기도 어렵다. 비공식적이란 말은 스포츠가 아니라 바로 ‘싸움’ 이니까. 다만 만일 그런 종목선수간 싸움이 생긴다면 ‘레슬링이 최고일 것’이란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잡을 곳도 마땅치 않고 땀이 범벅이 돼 잡기도 힘든 상황의 레슬링에서는 그야말로 번개같이 상대를 껴안거나 휘감아야 해 레슬링선수의 빠르기와 힘이 으뜸이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인다.
레슬링선수가 빠르고 힘이 있다해도 그가 손가락을 다쳤다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엄지손가락을 포함해 세 개의 손가락이 없다면…. 태릉선수촌 촌장을 지낸 이상균(69)씨. 스포츠계에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는 레슬링선수로는 치명적일 수 있는 손가락 셋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56년 멜버른 올림픽 밴텀급에서 4위를 했다. 국내 레슬링사상 최초의 올림픽 4위였다. 입상은 아니었지만 후학들은 그것을 ‘빛나는 입선’으로 기록한다. 훗날 레슬링에서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오는 거름이 됐다는 뜻도 있지만 ‘정신력의 귀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6.25 전쟁 당시 특무대 문관으로 일하던 그는 51년 불법무기 수사중 수류탄 사고로 왼손 엄지 등 손가락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도전욕은 그치지 않았다. “레슬링은 손가락 없이도 할 수 있을 거야.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라는 은사 황병관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그는 왼팔로 상대 팔을 끼고 오른팔은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 목을 휘감는 기술을 연마했다. 전쟁중이었지만 그 해 가을 광주 체전 플라이급에 출전한 그는 손가락 통증을 참으며 우승했다. 이듬해인 52년 서울 체전에서도 우승했는데 그는 결승에서 늑골을 다쳐 경기후 병원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시드니 올림픽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력의 승리’ 소식도 듣는 올림픽이 되면 좋겠다.
윤득헌dh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