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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손 다친 연주가들, 더욱 빛난 예술혼

입력 | 2000-08-09 18:56:00


“무식한 강도놈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하필 손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장 애호하는 피아니스트’ 로 알려진 영국의 저명 피아니스트 존 릴(56)이 손을 못쓰게 될 뻔 했다.

▲ 강도에 저항하다 손을 다친 영국의 피아니스트 존 릴.

지난달 말,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를 위한 콘서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릴은 복면을 한 떼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지갑을 내놓으라”는 위협에 그는 저항했지만 결국 강도들이 휘두른 칼에 양손을 깊이 베이고 말했다. 릴은 급히 인근 병원에서 봉합수술을 받았으나 건(腱)이 잘리고 감염으로 손이 부풀어오르는 등 한때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손이 귀중한 줄 알면서 왜 강도에게 대들었느냐”고 주변에서는 질책했지만 그는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에 긍지를 느낀다”고 대꾸했다.

▲ 슈만

▲ 개리 그라프만

▲ 파블로 카잘스

음악사에는 손을 다친 연주가들이 자주 발견된다. 낭만주의의 거장 슈만은 자신이 개발한 손가락 훈련기구를 무리하게 사용하다 결국 손을 못쓰게 됐다. 대 피아니스트 슈만은 탄생하지 않았지만 대신 ‘대작곡가 슈만’의 이름이 음악사에 남았다.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은 1차대전에 참전, 오른손을 잃은 상이용사가 됐다. 안타깝게 여긴 친구 라벨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해 주었다. 이 곡은 부상과 질병 등으로 한 손을 잃은 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표준 레퍼토리’가 됐다. 60년대 명성을 날린 피아니스트 개리 그라프만은 근육 염증으로 활동을 중단했지만 피아노 명교사로 변신해 수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젊은 시절 등산을 하다가 굴러내려온 돌에 손을 찧어 중상을 입었다. 그는 “손을 다치는 순간 ‘앞으로는 지겨운 연습에서 해방되는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절망감은 그 뒤에 닥쳤다”고 회고했다. 상처는 금방 회복됐고, 그는 금세기의 대표적 첼리스트라는 칭호를 넘어 첼로라는 악기의 위상 자체를 크게 격상시킨 연주가로 기록됐다.

강도에게 습격당한 존 릴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를 담당한 의사들은 6일 “다행히 릴의 손은 연주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될 수 있다”고 밝혔다. 숨을 죽이고 추이를 지켜보던 영국 음악팬들이 환호성을 올린 것은 물론이다. 릴은 ‘훌륭한 연주자’에 ‘용기있는 시민’ 칭호까지 받게 됐다.

릴은 1970년 ‘적성국가’인 소련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978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베토벤의 소나타가 그의 장기로 영국 ASV에서 전곡 앨범이 발매돼 있다.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