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 일본 3국은 아직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패권주의 야심에서 저질러진 여러 전쟁과 식민지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상호불신 관계를 근본적으로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경제발전과 산업화의 선두주자로서의 일본과 이를 뒤쫓는 한국과의 산업과 무역 불균형이 지속되면서 양국 간의 경제관계마저 기존의 상호불신 관계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며 과감한 경제개혁을 추진해온 중국도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 중 일 3국만의 경제협력 체제의 제도화에는 분명한 부정적 입장을 지녀왔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한 중 일 3국은 유럽연합의 출범과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체결을 위시한 범세계적 지역주의 추세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3국만을 위한 독자적 경제협력체는 물론 쌍무적인 지역협정도 체결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말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그 전염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본 한 중 일 3국은 지역경제협력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자세를 갖게 된 것이 분명하다. 1999년 11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동남아국가연합(ASEAN)+3 회의시 한 중 일 3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경제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연구에 착수하기로 합의한 것은 이러한 자세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 즈음하여 필자는 한 중 일 3국 재무장관 정례회의를 제의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금융위기의 발생소지와 전염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거시경제정책의 조율과 협의, 금융관련 정책 및 단기자본 유출입에 관한 정보교환 등이 원활하게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7월 31일∼8월 2일, 3일간 미국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동북아 경제협력 구상’ 국제회의에 참석한 바 있다. 이 회의에서는 동북아지역 발전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민간자본 유치에 선행돼야 할 도로 항만 통신시설 등 현재 크게 미흡한 사회간접자본 확충방안 등이 중점 논의됐다. 특기할 만한 것은 동북아지역이 필요로 하는 사회간접자본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개발은행 설립 주장은 이 지역이 필요로 하는 사회간접자본 투자소요액과 기존의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기구와 일본을 비롯한 이 지역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공공자금, 그리고 이 지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민간자금 추정액과의 차액(연간 50억달러 이상)을 조달하기 위해 국제금융시장에 나가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지역금융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주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동북아지역의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요한 북한경제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궁극적인 한반도 통일에 동북아개발은행이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동북아지역은 풍부한 천연자원과 우수한 인적자원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다. 산업화 단계나 자원보유 측면에서 상호 보완성이 높은 한 중 일 3국이 긴밀히 협력해 나간다면 이 지역의 무한한 성장 잠재력은 곧 현재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앞서 한 중 일 3국간에 상존하는 상호불신을 해소하고 미래지향적인 상호신뢰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3국이 함께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필자는 동북아개발은행의 설립 운영도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북아개발은행이야말로 한 중 일 3국이 손을 맞잡고 동북아지역의 지속적인 발전과 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향해 일하도록 하는 중요한 기틀이 될 수 있다.
특히 잘못된 과거 역사의 상흔(傷痕)을 지우고 상호신뢰기반 구축에 앞장서야 할 일본이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을 위해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해본다. 아울러 한 중 일 국민 모두는 이웃나라와 더불어 살 줄 아는 공존 공영의 지혜를 펼쳐나가야만 한다. 친구와 이웃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나 있지만, 이웃나라는 좋든 싫든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것 아닌가.
사공 일(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