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5주년,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일본 영화 ‘러브레터’ ‘철도원’ 등은 이미 한국인이 좋아하는 영화목록에 올랐고 구라모토 유키(倉本裕基)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음반이 레코드점에서 인기리에 팔린다. 지하철에서는 스즈키 고지(鈴木光司)의 소설 ‘링’을 읽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일본어 학원에서는 ‘러브 제너레이션’ ‘롱 버케이션’ ‘뷰티풀 라이프’ 등 일본의 인기 TV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26, 27일에는 일본의 인기그룹 ‘차게 앤드 아스카’의 내한공연도 열린다.
꼭 10년 전인 90년의 광복절. 서울 강남의 한 가라오케바에서 손님이 일제음반의 연주에 맞춰 노래부르는 모습이 일본문화 침투의 상징처럼 지적됐고 일본 만화 ‘닌자’가 영화와 비디오로 방영된 사실로 시끄러웠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이 막을 내리기 직전인 79년의 광복절. 일본문화의 수입보다는 일제의 잔재인 일본색(色)으로 ‘와리바시’ 같은 일본어와 교복 입기, 단체기합 등이 성토됐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다음해인 66년의 광복절. 젊은 세대가 충동적이지만 식민교육을 받지 않아 일본의 영향에 덜 물들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일본〓악’의 도식이 사라지고 일본을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은 90년 전반기를 지나면서부터다. 해외여행자유화로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천의 얼굴을 가진 일본’ 등 일본 경험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소개됐다.
또 해방 이후 학교를 다녀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세대와 전혀 다른 세대가 출현했다. 대학입시를 위해 일본어를 제1외국어나 제2외국어로 공부한 현재 25세 미만의 세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직접 일본잡지를 읽고 일본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서울대 국문학과 김윤식(金允植)교수는 “문화는 강대국에서 약소국으로 흘러가도록 돼 있어 우리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관계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며 “남북통일 등으로 우리의 국가적 역량 자체를 키울 수 있는 계기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화를 제대로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화개방의 물결에 밀려 일본군위안부 등을 둘러싼 과거 청산이나 손해배상 요구가 한일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또한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한상일(韓相一)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현 정권 들어 손해배상 같은 문제가 극히 소홀히 다뤄지는 데 반해 일본에서 ‘자유주의사관연구회’나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생겨 국가주의로 기우는 것은 우려할 만한 불균형적인 현상”이라며 “유럽이나 미국에서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책임을 묻는 자세는 우리도 본받아야 할 태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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