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도 지나고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올 여름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다음 작품을 구상하시느라 여전히 바쁘시지요? 작가는 그 작품의 그림자라고들 하지요. 작품이 세상에 나가 빛을 발할수록 작가는 더욱더 어두운 창작의 고통에서 신음한다는 뜻입니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을 통해 '한국 영화의 대들보'가 되셨으니, 새로운 작품에 대한 부담이 한층 더하겠지요. 몇 번 멀찍이 떨어져서 감독님을 뵈었지만 개인적으로 감독님의 고민을 안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감독님이 예전에 쓰신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재미있게 읽은 것처럼 영화 두 편을 보았을 따름이지요.
'박하사탕'이 개봉되었을 때 쏟아진 열광과 칭찬을 기억합니다. 그만큼 찬사를 받을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글쓰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한국영화계의 또다른 문제점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그 폭풍우도 지나갔으니, 오늘은 차분하게 '나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질문을 감독님께 던지고 싶습니다.
감독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제 나이가 20대 후반이었는데, 이제 저도 서른셋, 예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서른셋에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섰는데 명색이 소설가인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자책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러면서 자꾸 20대를 되돌아보고 40대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지나온 10년 세월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닥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겠지요.
'씨네 21'을 통해 장선우 감독님과 감독님의 글이 나란히 올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분께서는 각자 서로의 작품에 대한 동감을 드러내셨더군요. 그 글들을 읽으며, 또 두 분의 작품 '거짓말'과 '박하사탕'을 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이곳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40대 남자의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40대란 무엇인가? 삶의 존재의의를 잃어버린 나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돈이나 계집이든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마흔이 되면 저렇게 내리막길을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장선우 감독님이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길을 택했다면, 감독님은 내가 왜 이모양 이꼴이 되었는가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택하셨지요.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의 길들을 여기서 또 언급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물음은 이것이지요. 그렇게 거슬러 올라 나이 스물에 이르렀을 때, 그 시절은 과연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웠는가? 나이 스물의 '희망'이라는 것은 나이 마흔의 '절망'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거짓 알리바이가 아닐까? 지나간 과거, 특히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던 스무 살 그 시절은 뒤돌아보면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 시절도 때묻고 더럽고 힘들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마흔과 스물을 대비시키며 단정하게 끝이 났습니다. 감독님께서 그렇게 영화를 만드신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감독님도 벌써 알고 계시듯이 스물의 아름다움이 마흔의 절망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례를 무릅쓰고라도 감독님께 자꾸 묻고 싶어집니다. 자살에 이를 정도로 고통받는 대한민국 40대 남자가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영화 속의 설경구는 기차에 깔려 죽었지만 감독님은 살아서 바로 그 40대를 관통하고 계시니까 어떤 비법이 있지 않을까요?
다음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마흔 살의 희망을 엿보고 싶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