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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민병욱]광복절과 국회

입력 | 2000-08-14 19:11:00


조국이 끝이 안보이는 암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심훈은 시 한 편을 썼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뤄내야 할 광복의 염원을 '그날' 의 희열에 빗대 토해낸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 … /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 ….

오늘 오후 오매불망 50년을 기다려오던 핏줄을 만나는 이산가족의 심정이 이러할까. 눈물범벅이 된 뺨을 맞대고 얼굴의 주름을 어루만지며 '더덩실 춤추고 용솟음치는' 기쁨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이들에게 오늘은 말 그대로 '빛을 되찾은' 소중한 날이 되지 않겠는가. 목놓아 울면서 오늘의 감격이 그치지 않기를, 진한 핏줄은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음을 새삼 확인하는 광복의 8월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감격의 순간에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번 만남은 너무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남북한 2백명의 가족이 서울과 평양에서 재회의 기쁨에 몸을 떨 때 수십만 미상봉 이산가족은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남몰래 꺼억꺼억 울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만나기는커녕 헤어진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채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만남의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는 동포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조치가 시급하다는 얘기다.

그것은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해야할 일이다. 더많은 이산가족이 재회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상설면회소를 조속히 설치하고 남쪽만도 8만명에 달하는 상봉신청자 가족의 생사확인작업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북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이산가족 상봉을 9, 10월에도 실시하고 내년부터 가정방문까지 본격추진하자고 밝혔지만 그 한사람의 말로 모든 것이 다된 양 뒷짐지고 기다리는 꼴이 되어선 안된다. 50년만의 만남이 겨우 성사되는 이 마당에도 고령으로 숨져가는 이들이 속출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정부 못지않게 이산가족의 비원(悲願)을 푸는데 노력해야할 기관이 국회다. 단 한명의 국민이라도 슬픔과 아픔 속에 방치할 수 없는 국민의 대표기관이기 때문이다. 미상봉 이산가족들의 통한, 그 설움의 눈물을 쓸어담아 정부와 북한당국에 상봉확대를 요구하고 그를 위한 지원도 밤새워 논의해야 마땅한 기관이다. 김정일위원장이 그렇게 쉽게 상봉확대를 호언하기 전에 먼저 그런 방안을 제시하고 이끌어나가는 자세를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회는 어디 있는가. 많은 의원들이 외국에 나가 있다. 온갖 시름은 국민에게 던져준채 하루종일 골프장에서 소일하는 의원도 있다. 일부는 당 최고위원 선거를 한다며 대의원들과 웃고 마시며 표를 얻기 위해 돈과 정력을 쏟고 있다. 이런 판국에 여야 대표들은 '민생투어' 라는 같잖은 이름을 붙인 지방나들이에 열중하며 잊을만하면 기자회견을 갖고 상대방을 사정없이 깔아뭉갠다. 또 그걸 꼬투리 삼아 말싸움을 만들어 국민을 한없이 피곤하게 한다.

이것이 광복절 아침의 한국이다. 선정된 소수의 만남 뒤안에 다수의 울음이 있고 의료대란과 경제불안 등 사회의 혼돈 뒷켠에 어쩔줄 모르는 정부가 있으며 이런 총체적 위기를 '나 몰라라' 팽개쳐둔채 놀고 있는 국회가 있다. 남북은 민족화해주간까지 설정해 앞으로 한발 크게 내딛을 길을 찾느라 분주한데 남남(南南)이 모인 국회는 정말 남남처럼 등돌리고 앉아 걸핏하면 상대편을 할퀴는데 열중하고 있다. 상처받고 웅크린 국민을 도닥거려도 시원찮을 판에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새천년들어 처음 맞는 광복절 국회가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투영되는 것은 비극이다. 대의(大義) 앞에 소리(小利)를 버리고 당과 '대권' 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며 아픈데를 어루만지고 눈물을 닦아주는 21세기 정치는 진정 우리에게 요원한 것인가.

국민의 절박한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국회는 더 이상 국민의 대표일 수 없다. 광복절을 보내고도 여전한 식물국회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젠 정말 온 국민이 나서 '불량품 소환운동' 이라도 벌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