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 이번까지 무려 84차례 사면복권이 행해졌다. 3·1절 석가탄신일 광복절 성탄절 대통령취임일마다 어김없이 사면복권을 베풀다보니 지위가 높았던 전과자(前科者)들은 국경일을 앞두고 줄대기에 바쁘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군사반란으로 얼룩진 헌정사만큼이나 불행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면복권의 횟수는 독재 권력의 폭압성을 재는 척도였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집권기간을 고려하면 역대 정권에서 전두환(全斗煥) 시기가 가장 빈번해 8년 동안 무려 21차례의 사면복권이 이루어졌다. 시국사범에 대한 거듭되는 대량구속으로 구속자수가 많아져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하면 대규모 사면을 통해 풀어주는 식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사면권이 남용되다 보니 법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다.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라는 ‘큰 재판’과 법관들의 ‘작은 재판’으로 이원화돼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사법부에서 나온다. ‘3심’ 위의 ‘4심’이라는 비판도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이렇게 사면권을 남용해 정치적 목적으로 범법자들을 봐주다 보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등 중대범죄에 대한 사회적 불감증이 생겼다. 이번 사면복권에 포함된 인사들 중에는 공직 재임중 뇌물을 받은 부정부패 사범, 선거부정 사범, 금융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거액의 탈세를 저지른 경제사범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정부가 틈만 나면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사정의지를 다지면서 사면복권 때마다 부정부패 사범을 매번 풀어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수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안가 집행유예 보석 등을 통해 풀려나고 다시 몇 년 뒤에는 사면복권을 받고 의정 단상에서 호통을 치는 모습에 우리는 익숙하다.
특히 검찰과 법원에서는 16대 총선 선거사범 처리가 한창이고 ‘어떻게 되든 당선만 되면 끝’이라는 나쁜 관행을 고쳐놓겠다고 벼르는 마당에 대통령은 15대 총선 사범에 대한 사면복권을 단행했다. 한 차례 출마 못한 ‘정치 동업자’들에 대한 동정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해석이 나오기 어렵다.
민주화 시대에 법의 권위를 바로 세우자면 대통령의 사면권은 자제돼야 한다. 부정선거와 부정부패 사범이 활개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