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었구나!”
그렇다.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험난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살아 오며 몹쓸 짓도 많이 했지만 오늘은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용서할 수 있다. 가족과 친지를 두고 남과 북의 경계선을 넘었을 때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마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할 생이별의 죄악을 오늘은 모두가 용서할 수 있다. 죽은 자의 무덤이야 덮어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니, 이제 살아 있는 자를 용서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다.
◇만남통해 원망 일시에 사라져
“우리는 50년간 서로가 지워버릴 일이 있는 처지”라며 “너무 인간적이고 동포애만 강조하면 안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은 노련한 정치가다운 생각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그 모든 원망을 단숨에 지워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어려웠던 시절 가족과 고향을 두고 떠나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기도 했던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특히 이념을 달리하는 남과 북의 집권자로서야 ‘인도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괘씸한 배신자들을 응징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처벌을 통해 죄인을 다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회복시킨다는 응보주의적 처벌도, 예방과 교화를 목적으로 한 공리주의적 처벌도 이미 긴 세월을 그리움으로 지샌 이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죄없이 버려졌던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을 두고 떠났던 아버지를 용서하는 판에 더 이상 그 죄의 대가를 요구할 근거가 박약하다.
남북 교류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가슴 조이며 기다렸던 그 수많은 날들. 아마 그렇게 가슴 저미는 그리움 속에 떠난 자에 대한 원망은 이미 다 스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처벌을 합리화하는 데는 많은 논리가 필요하지만 용서에는 별다른 논리가 필요치 않다. 용서는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독일 역사철학자인 칼 뢰비트는 역사에는 단지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오늘의 이 역사적 사건 앞에서 ‘가족’과 ‘용서’의 의미를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준비한 사람들은 나름의 의도와 목적과 계산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모든 자잘한 이유들은 이들이 흘리는 눈물 앞에 무색해지고 만다. 이제 이 뜨거운 가슴들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는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 감동을 연출하는 것은 정치도 경제도 아닌 ‘핏줄’이고 ‘가족’이다. 우리는 그 동안 근대화 산업화라는 지상과제 아래 가족의 해체를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 왔고 가족의 기능 중 상당부분을 사회가 대신해 가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또 합리적 사회를 위해 봉건 잔재의 상징이라는 ‘가족주의’를 청산 대상 제1호로 삼아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명절때마다 민족의 대이동을 보며 엄청난 민족적 에너지의 존재를 느껴 왔다.
◇'가족의 힘'이 통일 에너지
9월과 10월에도 이산가족 상봉이 계속되고 내년에는 직접 고향집에도 방문할 수 있으리란다. 통일을 위해 풀어가야 할 수많은 난제들이 앞에 놓여 있지만, 우리가 소홀히 해 왔던 ‘가족’의 힘이 통일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할 에너지를 공급해 줄 것이다.
가족이 새삼 소중하다. 그 동안 남북통일의 타당성과 효과를 설명해 내기 위해 동원됐던 수많은 언사조차 이제 이 ‘가족’과 ‘핏줄’의 수식어일 뿐이다. ‘통일’이란 바로 ‘분단’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가족의 아픔을 줄여 가는 것 그리고 다시 아픔을 겪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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