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 흘러 보낸 반세기의 세월, 갈 수 없었던 지척의 거리를 순식간에 뛰어넘으면서 이산가족들이 만나던 남쪽의 서울 삼성동 컨벤션센터와 북쪽의 평양 고려호텔 상봉장을 지켜보면서 극작가인 나는 문득 40년 전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야구경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쓰면서 9회 2사 후에 경기가 역전되게 하였는데, 작품을 읽은 프로듀서는 내용이 지나치게 극적(劇的)이어서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나 프로야구 붐이 일면서 9회 2사후에 경기가 역전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열다섯살 때 어머니의 심부름을 갔다가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가 되어 돌아와 어머니, 이제 돌아왔습니다 하면서 통곡하는 내용의 드라마를 써서 방송국에 내민다면 대부분의 프로듀서들은 9회말의 역전극처럼 현실성이 없다고 책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열다섯 살에 심부름을 갔던 아들 이동섭(65)씨가 50년 만에 돌아와 백발의 어머니 장순복(87)씨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이점이 진실성을 동반한 사실(事實)이 픽션(虛構)을 능가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은 픽션으로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을 감동하게 하고자 하지만, 사실의 내면에 담겨진 범접할 수 없는 진실을 뛰어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드라마를 보면서 흘린 눈물과 이산가족의 상봉을 보면서 흘린 눈물은 그 가치가 전혀 다르다.
50년 만에 아들을 만난 정선화(94)씨는 늙은 아들 조진용(69)씨와의 상봉이 믿기지 않는 듯 흥건한 눈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급기야 실신, 망연자실한 아들을 남겨두고 의료진에 의해 상봉장을 떠나가야 했는가 하면, 치매를 앓아 지난 10년 동안 말을 못했던 조원희(100)씨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둘째 아들 리종필(69)씨를 만나자 니가 종필이냐… 면서 잃었던 말을 되찾기도 하였는데 모두 픽션의 한계를 훨씬 더 뛰어넘은 진실을 동반한 사연이어서 감동은 클 수밖에 없다.
이같은 만남의 사연을 두고 언론은 각본 없는 드라마 라고 제목을 뽑았다. 그렇다. 이산가족의 상봉은 픽션이라는 개념의 드라마와는 정말로 거리가 멀다. 이건 사람이 겪는 삶의 진실을 세월에 실어 보여주는 것으로 극작가인 나에게 더없는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세월이란 무엇인가. 비바람 급류가 더러는 거친 돌덩이를 갈고 다듬어서 천하제일의 수석(壽石)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에게는 늙고 병들게 하는 풍상(風霜)일 뿐이다. 방북신청을 한 사람이 7만 7000명에 이르고, 남쪽의 전체 이산가족이 767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을 덮친 반세기의 풍상을 지켜보면서 픽션의 세계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몇번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봉승(극작가·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