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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재벌의 문어발 벤처

입력 | 2000-08-16 19:36:00


재벌들의 벤처 투자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총수의 2세에게 부(富)를 이전하는 수단으로 쓰이거나 위장계열사로 운영하면서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 현대 LG SK 등 4개 기업집단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등 조사에 들어가면서 일부 재벌이 특수관계인(총수의 2세)이 소유한 벤처기업에 부당지원한 혐의를 인지(認知)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사실 관계는 조사를 통해 차차 드러나겠지만 공정위는 지금까지의 자료수집을 통해 4대 그룹 계열사가 벤처기업에 부당 지원한 증거를 충분히 확보해놓고 칼을 빼든 것으로 보인다.

재벌그룹들은 최근 수년 동안 벤처에 대한 우호적 사회 분위기와 정책지원을 배경으로 신경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대적인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이들 재벌 벤처는 절반 이상에 이르는 지분을 재벌 2, 3세가 소유하고 있다.

이들 재벌 벤처는 모그룹 계열사로부터 자금 및 우수 인력을 대거 지원받아 그룹 내부에서조차 불만이 새어나올 정도이다. 이렇게 대기업 계열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벤처기업은 안정성과 미래성장성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춰 재벌 2, 3세가 보유한 주식의 가치를 크게 높이게 된다. 결국 재벌 2, 3세가 세금을 많이 물지 않고서도 부를 이전받는 신종 변칙 상속수법인 셈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특정 벤처기업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계열로 편입하지 않은 탈법 위장계열사도 있다. 재벌이 지분 참여한 벤처캐피털 등 금융기관이 계열사간 자금지원의 매개 역할을 하는 지능적인 지원 수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재벌이 기술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 모험산업에 문어발식으로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재벌의 벤처투자는 기존 오프라인 산업과의 연계성을 지닌 경영전략적 투자에 그쳐야 한다.

재벌의 무분별한 벤처 진출은 공정경쟁 기반을 무너뜨리며 모처럼 돋아난 벤처들의 싹을 짓밟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장 재벌 계열사가 재벌 2, 3세 소유의 비상장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상장 계열사 소액주주의 이익을 편취하는 짓이다.

공정위는 두달 동안 4대 그룹 중에서도 벤처 진출이 빨랐던 삼성과 SK 그룹에 대해 조사를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정위는 미리 시한을 못박지 말고 충분하고도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벤처기업이 변칙적인 증여 상속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