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 날 그래야만 했을까?'
지난 15일 오후 5시께 TV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마 누구나 할것 없이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는 타의에 의해 반세기를 헤어져 살아온 이산가족들이 감격의 해후를 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됐다.
화면 속의 사람들이나 TV를 보는 사람들이나 이념의 대립 속에서 평범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뼈아픈 별리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마침 이 날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광복절이었기 때문에 그 느낌은 더욱 남달랐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TV의 다른 채널에서는 전혀 다른 별천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이산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50년만의 상봉을 하는 그 때, KBS 2TV에서는 마냥 즐겁고 경쾌한 댄스음악이 쏟아지고 있었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께 방송하는 의 시간이었던 것.
현란한 의상과 분장을 한 댄스 그룹들이 영어 반, 우리말 반으로 이루어진 댄스음악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추며 노래하고 있었다. 한쪽은 서러움과 반가움의 통곡이, 다른 쪽에서는 관능적인 선율에 흥이 한껏 오른 탄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꼭 이래야만 했을까?
흔히 방송 프로그램의 편성은 시청자와의 약속이라고 한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방송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는 것은 이제는 상식에 속한다. 주말 저녁에 방송하던 드라마가 만약 월요일이나 화요일 심야에 방송된다면 시청자들이 느끼는 혼란과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방송사들은 가급적 정해진 편성시간을 지키려고 하고,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화면에 자막으로 시청자의 양해를 구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경우와 상황에 따라 예외가 있는 법이다. 다른 때는 늘 국가기간방송이다, 공영방송이다 하며 권위와 위상을 강조하던 KBS가 하필 그 때 그토록 '철저하게' 편성순서를 지켜야만 했을까?
더구나 이산가족이 상봉한 날이 무슨 날인가? 36년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겨우 우리 민족의 자존을 되찾은 광복절이다. 일본 문화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이 날은 참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날 에서는 오히려 일본의 무협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의상과 헤어스타일을 꾸몄다는 댄스 그룹이 천연덕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노래를 탓할 생각도 없고, 왜 하필 일본풍 의상이냐고 비판할 생각도 없다. 그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음악적 표현이니까. 미국식 힙합은 되도 일본식 노래는 안된다는 이율배반적인 지적을 할 의사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날만은 피했어야 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민족 분단의 아픔이 생생히 드러난 이날, 그리고 일제에서 벗어난 것을 기리는 해방 55주년의 이 날은 피하는 것이 도리였다.
KBS가 조금이라도 시청자의 입장을 생각했다면 는 15일 방송을 쉬던가, 아니면 적어도 시간대를 조정해 이산가족 상봉과 방송이 겹치는 것이라도 피했어야 했다. 편성에서 그 정도의 탄력성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혹 일주일 내내 그 프로그램을 기다렸던 청소년 시청자들 위해서였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신세대, 우리의 청소년이 광복절 때 가수 얼굴 보는 것을 한 주 걸렀다고 난리를 칠 정도로 철없는 세대인지….' 그들 역시 그 날만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가릴 줄 아는 분별력과 사려가 있는 한국인들이다. 다시 한번 씁쓸한 기분으로 KBS에게 묻고 싶다.
'꼭 그 날 방송을 해야 했을까?'
김재범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