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들에게 가장 결례가 되는 질문의 하나는 “왜 수녀가 되었으며 어떻게 사시느냐”고 묻는 것이다. 정말 그들은 왜 수녀가 되었으며 수도 생활은 과연 어떨가.
우리나라에는 90여개 수녀회에 9000명의 수녀가 있다. 이중에는 가르멜 글라라 도미니꼬회 천주의모친 등 기도와 노동만으로 24시간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회도 있지만 대부분은 병원이나 양로원 고아원 장애자 복지시설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으로 헌신하고 있다. 의지할 곳도 없고 얻어먹을 힘 조차 없는 심신장애자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섬기는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 수녀들은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봉사생활로 유명하다.
가톨릭 교계신문인 평화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이충우(李忠雨·62·신앙유산연구회장)씨가 엮은 ‘하느님 귀염둥이의 행복’(사람과사람)은 30명의 수녀가 성속(聖俗)을 넘나들며 겪은 이야기들을 솔직히 털어놓은 고백록이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의 최성윤수녀의 일화. 1979년 사제 서품 1년 만에 세상을 떠난 고 김재문신부는 병마와 싸우던 중 수녀들의 문병을 받고 노래를 청했다. 일행 가운데 가장 노래를 잘하는 어느 수녀가 ‘기다리는 마음’을 부르자 그는 “당신의 목소리는 수도자의 소리가 아니다”고 짜증을 내며 노래를 중단시킨 뒤 이에 항의하는 최수녀에게 대신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서툰 노래를 듣고난 그는 “수녀님은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있으니 반드시 좋은 수녀님이 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정성껏 부른 노래가 자만심을 가진 사람의 노래보다 훨씬 듣기가 좋아요”라고 칭찬했다. 최수녀는 이 때의 충고를 수도생활 내내 간직했고 질책을 받았던 수녀는 끝내 수도자의 길을 가지 못했다.
샬르트 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기태옥수녀는 첫 소임지의 분원장수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녀’로 기억해 냈다. 남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혼자 끙끙거리며 앓고 있던 자신에게 “수도자는 독신녀가 아니라 수도가족”이라고 위로해 주었고, 화창한 봄날 면회온 어머니를 ‘어머님, 저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냈다가 “부모없는 수도자가 어디있느냐. 배은망덕도 분수지!”라며 호되게 꾸짖었던 분이었다.
수녀가 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장명희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절에서 수도하고 계신 아버지 대신 도를 닦겠다며 식구 몰래 수녀원으로 도망쳤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의 사랑을 되찾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명자수녀(살레시오수녀회)는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녀회에 입회한 자신의 뒤를 이어 4년후 언니도 수도자의 길로 들어서 아버지를 노엽게 했으나 아버지가 말년에 독실한 가톨릭신도가 된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이밖에 장자(莊子)의 우화를 곱씹으며 무소유의 생활을 다짐하고 있는 김태순수녀(성가소비녀회), 수녀원의 자그마한 텃세와 엄격한 상하관계를 살그머니 암시한 김혜련수녀(노틀담 수녀회), ‘여자는 추억으로 살지만 수녀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김현옥수녀(성바오로 딸 수도회) 등의 고백도 실려있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해인수녀(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꽃골무의 추억 속에’란 제목으로 어머니께 쓴 편지를 공개했다.
“오늘도 저는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삽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저는 저의 뜻과 결별하고 형제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매사에 참을성 있고 작은 고통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남들에겐 말도 잘하는 저이지만, 저 자신은 실천에 있어 형편없는 열등생임을 당신께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저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기도해 주시겠지요.”
부모의 곁을 떠났을 때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부모는 그들이 아직 자신의 딸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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