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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신간]'미시사란 무엇인가'…역사는 인간이다

입력 | 2000-08-18 18:51:00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어릴 때부터 옹알거린 우리 역사의 원소 주기율. “공제공제공공공.” 대혁명이후 오늘날까지의 프랑스의 정체(政體) 변화사 공식. 우리에게 역사란 왕, 사건, 연대의 행렬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웠다. 왕의 이름을 암기했고, 혁명을 통해 역사를 기억했으며, 연표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일까.

‘장미여관의 마교수’조차 ‘역사’에 대해 투덜거린다.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라고만 돼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하지만 이제 마교수도 한시름 놓을 게다. 졸병 농민 여성 등 기존의 영웅주의적 사건중심적 연대기적 역사에서는 잊혀진 사람들의 실제적 생활양식과 구체적 사고방식을 탐구하려는 물결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미시사가 그 대표적 실례다. 곽차섭 교수가 엮은 ‘미시사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 새로운 역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간행된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미시사에 대해 무얼 말해줄까. 우선 지적할 것은 미시사의 창건자들, 예컨대 진즈부르그와 레비 등이 직접 들려주는 미시사의 탐구대상과 방법론, 그리고 그 목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에 따르면 미시사의 출발점은 사람냄새 나는 역사에 대한 갈망이다. 그들이 볼 때 장기적 시기에 대한 계량적 연구로 요약되는 기존의 역사학은 역사의 전체적 흐름을 간파한다는 그 거시적 목표 때문에 정작 그 흐름을 만들어 낸 개별적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놓쳐 버렸다. 미시사가들이 미시사를 “실제의 삶에 대한 과학”으로 못박고, “짧고 분출적인 시간의 한계”에 갖혀 있는 다양한 인간들의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생생하게 느껴지는 생의 체험”을 재구성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냥꾼의 방법에 입각한 ‘추론적 패러다임’이다. 즉, 사냥꾼이 발자국 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짐승들의 형태를 알아내듯이, 역사가는 ‘보통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심지어는 사소하고 부차적이라고까지 생각되는 세부 사항들’인 단서에 입각해 인간의 삶이 지닌 다색의 뉘앙스를 ‘촘촘하게’ 읽어낸다. 또 이를 토대삼아 ‘어떤 개인이 특정한 사회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망’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즈부르그가 역사는 ‘징후적 추론적 지식’임을 되풀이해 강조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미시사 대부들의 육성을 들려준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곽 교수의 논문들 또한 독서의 기쁨을 더해 준다. 미시사의 특징과 가치에 관한 그의 명쾌한 정리는 참으로 상큼하다. 바쁜 독자는 그의 글만 정독해도 자신의 미시사 지평이 확대됨을 실감할 것이다. 비록 미시사의 문제점들, 예컨대 단서 해독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사색의 아쉬움은 남지만, 이런 문제의 해결이 어디 그만의 몫이겠는가. 글쓴자만큼의 고민으로 이 책의 여백을 메워갈 독자들이 그립다. 449쪽, 1만9500원

김현식(한양대 강사·서양사)